[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숲하루 풀꽃나무 이야기 14] 비 집을 나설 적부터 비 오는 날이 좋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숲길이 질퍽하다. 길이 푹 꺼진 자리에는 웅덩이가 하나둘셋 나온다. 나뭇잎이 빗물에 쓸려 몰린 틈으로 물이 졸졸 흐른다. 그런데 어린 날에는 비 오는 날이 싫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비가 오면 엄마가 마중을 오지만, 마을에서 놀다가 소낙비를 맞고 소 먹이러 따라다니다가 소낙비를 맞고 들에 밭에 일하다가 비를 맞는다. 옷이 흠뻑 다 젖어 처마 밑에서 비 그치기를 기다리다가 집에 들어온다. 입술이 시퍼렇고 온몸에 닭살이 돋는다. 비 오는 날 아침에는 작은오빠하고 동생하고 셋이 서로 우산을 차지한다. 우산대가 벌겋게 녹슬고 살이 부러졌다. 대나무 비닐우산은 바람 불면 뒤로 까뒤집어진다. 빗줄기가 세차 우산을 써도 옷이 다 젖고 책도 젖는다. 그렇지만 비를 바라보는 일이 재밌다. 지붕 골을 따라 흐르는 물이 물받이로 모여 세차게 떨어진다. 커다란 고무통에 빗물을 받고 물받이 이음새마다 물을 받아 소죽도 끓이고 몸을 씻는다. 비를 맞고 온 날에는 빗물에 몸을 씻는다. 빗물에 비누를 바르고 머리를 감으면 머리칼이 부드럽고 빨래를 하면 때가…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숲하루 풀꽃나무 이야기 13] 가뭄 멧허리로 다니던 길이 넓어졌다. 왼쪽 숲은 잔디나 풀이 자라는 비렁인데 마흔 해 만에 오니 숲으로 우거졌다. 내리막길 아래는 자두밭으로 바뀌고 둘레에 쇠기둥을 꽂았다. 비가 안 와도 물 걱정이 없는 듯하다. 고개 들어 등성이가 만나는 멧봉우리를 보자니 사람 얼굴을 닮았다. 이마하고 코하고 입에 목줄기가 드러난다. 마을 들머리에서 보면 하늘을 바라보고 누운 듯하다. 내가 열세 살 적에 마을에 가뭄이 들었다. 비가 오지 않아 논바닥이 쩍쩍 갈라졌다. 손가락이 들어갈 만큼 갈라진 논에 뛰어가다 보면 발끝이 걸려 넘어진다. 물이 있어야 모내기를 하고 모를 심어야 쌀이 나오는데, 마을사람이 모였다. 비를 내려 달라고 멧님(산신령)한테 비손을 올린다고 사람을 뽑는다. 집안에 크고 작은 일이 없는 사람, 그해에 죽음을 치르지 않은 사람을 둘 뽑았다. 아버지가 뽑혔다. 혼자 멧골에 가서 비손하기가 무섭기에 두 사람이 같이 간다. 우리 아버지는 빔(한복)이 없어 흰 두루마기만 걸친다. 아버지는 이른저녁을 먹고 금성산에 갔다. 아버지는 밤새도록 멧골에 머물며 비손했다. 새벽에 우리 아버지가 내려오자마자 마을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숲하루 풀꽃나무 이야기 12] 느티나무 나무가 참 천천히 자라는 듯하다. 느티나무는 우리 마을에서 가장 크다. 학교 다닐 적에 늘 나무 밑으로 지나간다. 학교 마치고 오면 가방을 던져 놓고 굵은 나무에 올라가서 논다. 나는 다른 아이들보다 나무에 잘 올라갔다. 나무가 커서 손에 잡히지도 발을 올리기도 옮기기도 힘들어도 아랑곳 안 했다. 오월이면 마을에서 그네를 단다. 마을 언저리에서 어른들이 모여 한 줌씩 짚을 엮는다. 혼자서는 따지 못하고 여럿이 잡는다. 새끼줄은 한 움큼이나 되는 밧줄처럼 엮는다. 길게 꽈서 느티나무에 짊어지고 올라가서 그네를 거는데 사다리는 없고 맨몸으로 나무에 올라가고 도우면서 그네를 단다. 그네를 한 판 타려고 줄을 오래 선다. 한 집에 언니오빠에 동생이 줄줄이 있고 예순 집이 모여 사니, 아이들은 얼마나 많은지 줄을 기다려도 두세 판 탈까 싶다. 혼자 타다가 둘이서 마주보고 탄다. 뒤에서 그네를 세게 밀면 논에 떨어지는 듯하다. 나는 그네를 무척 타고 싶은데 너무 무서웠다. 그네가 높이 올라갈 적에는 무릎을 굽혔다 펼쳤다 밀고 그네가 내려올 적에는 가만히 선다. 혼자 타도 박자를 잘 맞춰야 하고 둘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숲하루 풀꽃나무 이야기 11] 깨 농약을 물에 섞어서 등에 짊어지고 약을 친 어머니가 바람결에 약을 마셔서 그런지 어질어질하다고 눕는다. 붉은상추가 있어 낮밥을 먼저 먹으려는데 어머니가 일어나 쌈장을 한다. 된장을 푸러 가다가 주저앉는다. 나는 종지를 받아 일러준 단지를 찾아 된장을 네 국자를 푼다. 어머니가 참기름을 듬뿍 붓는다. 참기름을 골고루 섞고 한 통 따로 담아 챙긴다. 부엌에 참기름 냄새가 가득하다. 어머니는 지난해부터 깨를 사서 참기름을 짠다. 내가 어릴 적에는 깨를 심었다. 깨가 다 자라면 목에 닿을 만한 키였다. 잎에 푸른 깨벌레가 꼬불꼬불 올라가면 깜짝 놀랐다. 깨를 찔 때가 다가오면 아버지가 낫으로 이파리를 쓱쓱 치고 나무 같은 깨를 벤다. 마늘 묶을 때처럼 두 단씩 두 쪽을 묶고 네 단을 하나로 묶는다. 밭이랑에 탑처럼 세워 놓고 깨나무가 누렇게 말라 탁 벌어지면 밭에 천막을 깔고 어머니가 하나씩 잡고 작대기로 살살 턴다. 한 벌 털고 다시 네 단을 아버지가 묶어 두면 나는 밑으로 기어 다니며 놀았다. 어머니는 한 톨이라도 깨가 땅에 떨어질까 싶어 살살 터는데 깨단 밑으로 지나가면서 흔들려 깨가 땅에 많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숲하루 풀꽃나무 이야기 10] 금낭화 고샅길 막다른 골목으로 들어가면 대문 바로 밑에 분홍빛 고운 금낭화가 피었다. 기다란 줄기에 금낭화가 주렁주렁 달려 꽃가지가 휘청인다. 마당에 들어서 허리춤에 오는 담벼락에 발길이 멈춘다. 도랑 하나 사이 둔 아랫집 뒤꼍이다. 어린 담쟁이덩굴이 흙벽을 타고 지붕에 기웃한다. 흙벽을 버텨 주는 나무가 까맣다. 마흔 해 동안 살던 우리 집은 허물고 빨간 벽돌로 집을 새로 지었는데 앞집은 내가 어린 날 보던 그대로 사람 손길이 닿지 않았다. 앞집에 숙자가 살았다. 나보다 한 살이 적은 데 샘에 갈 적마다 지나간다. 마당도 작고 집이 작아 오두막 같았다. 숙자 아버지는 늘 술에 절어 큰소리를 쳤다. 시골에서는 이 집 저 집 내 집처럼 드나드는데 숙자 집에는 아버지가 무서워 겨우 한 번 놀러 갔다. 언니오빠하고 뛰어놀 적에 숙자는 집 밖으로 잘 나오지 않았다. 내가 고등학교에 들어가고 얼마 안 되어 숙자가 죽었다. 읍내서 기차에 치였다. 졸업하던 날은 넓은 집에 사는 소꿉친구 남자애가 대구서 기찻길로 뛰어들었다. 우리 집 흙담 밑에도 금낭화가 몇 뿌리 피었다. 아랫집에서 씨앗이 날아왔는지 엄마가…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숲하루 풀꽃나무 이야기 09] 홍시 비슬산에 오르니 바람이 차다. 10도로 기온이 뚝 떨어진다. 입춘이 지났다고 곁님은 얇은 바지를 입고 오더니 덜덜 떤다. 참꽃 필 적에 가기로 하고 돌아선다. 건너쪽 꼭대기에 오른다. 맵찬 바람을 막고 볕이 든 알림말이 선 바위에 퍼질러 앉아 새참으로 말랑감을 꺼낸다. 햇빛에 빛나 반짝하는 감이 달다. 그래도 어린 날 먹던 우리 집 감이 더 달다. 금성산 밑에 마을이 들어서고 멧턱 밭에 감나무가 자란다. 이슬이 맞지 않을 적에 땡감을 따낸다. 서리가 내린 뒤에도 말랑감을 딴다. 아버지는 장대를 비틀어 가지를 꺾었다. 꼭대기가 높아서 장대가 닿지 않으면 까치밥으로 두었다. 밭 위아래에 두 가지 감나무가 있다. 한 그루는 찬감, 밑에 또 한 그루는 도감이다. 찬감은 납작하고 말랑말랑하고 껍질이 얇고 발갛고 도감은 대봉처럼 뾰족하고 껍질이 두껍다. 찬감은 달고 씨가 없다. 도감도 씨앗은 없지만, 씨앗 닮은 결로 타박타박하고 뽀드득 알갱이로 씹힌다. 아부지가 그 먼 곳에서 따다 놓은 홍시를 아랫방에 두고 겨울에 온집안이 먹는데, 작은오빠하고 나하고 몰래 많이 꺼내 먹었다. 배추 뿌리나 날고구마를…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숲하루 풀꽃나무 이야기 08] 솔가리 청도 밤티재에서 길을 헤매고 남산에 오른다. 들머리에 잣나무가 쭉쭉 뻗었다. 우거진 숲으로 오솔길을 따라 걷는다. 길이 폭신하다. 붉은 잣나무 이파리가 땅에 두툼하게 쌓였다. 가파른 등성이를 따라 오르자 바위가 가득하다. 돌 틈마다 소나무가 힘들게 자란다. 낭떠러지가 있는 모퉁이를 돌아 밧줄을 잡고 곁님이 오를 적에 나는 솔가리를 밟고 발로 파 본다. 두툼해서 땅이 보이지 않는다. 소나무가 많아 풀꽃도 드물고 솔가리를 파헤쳐 소나무 냄새가 짙다. 소나무 잎은 태워도 소나무 냄새가 난다. 내가 열한두 살 적에 멧골에 가서 땔감을 마련했다. 작은오빠를 따라가기도 하고 마을 언니들과 몰려다녔다. 까꾸리(갈퀴)로 그러모으고 마른 솔방울도 줍는다. 자루에 들고 가기 좋게 맞춤하게 채운다. 그리고 소나무 겉껍질을 낫으로 깎는다. 하얀 속껍질이 보이면 이로 깨물어 하모니카를 불듯 왔다갔다 하면서 송구를 뜯어먹었다. 맹 맛이고 뻐덕뻐덕한데도 배고파서 먹었다. 솔가리는 부엌에 두고 불쏘시개로 썼다. 더러 날소나무도 아버지가 베어서 쇠솥에 장작을 지펴 밥을 짓고 물을 데웠다. 그런데 마을에 순사가 떴다.…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숲하루 풀꽃나무 이야기 07] 순이나무 일터에 갈까 망설이다가 뒷골을 올라가기로 한다. 개나리 풋풋한 내음하고 아까시 꽃내음이 짙다. 꽃꿀을 찾는 벌이 바쁘다. 언젠가 이 뒷골에 아까시나무를 보러 온 적이 있는데, 그날 내가 ‘순이나무’라고 이름을 붙인 나무를 만났다. 일에 바빠 아이들을 할머니 할아버지한테 맡긴 내 모습을 나무 한 그루에서 보았다. 나는 일에 묶여서 옴짝달싹 못하고, 나무는 어디로도 못 가고 그 자리에 서서 꼼짝을 못한다고 여겼다. 너무 바쁘게 묶인 일이지만, 오늘만큼은 일을 잊고 싶어 뒷골에 올라서 순이나무를 찾았다. 여섯 해 만인가. 순이나무는 껍질이 홀라당 벗겨지고 불에 그을린 듯 까맣다. 나무줄기는 볼품없어 보이지만 우듬지에 흰꽃을 피웠다. 누가 이 나무를 보아줄까. 누가 이 나무에 핀 꽃을 알아보나. 꽃이 피니 잎도 돋고. 잎이 돋으니 나무는 늘 싱그러이 살아간다. 그 자리에 꼼짝을 못하고 박힌 듯하지만, 알고 보면 바람을 마시고 해를 머금으면서 홀가분하게 서서 푸르게 꿈꿀는지 모른다. 어쩌면 나도 일에 묶여서 살아가는 오늘이 아닌, 이 일을 하려고 여기에 와서 살아가는지 모른다. 좋은 일도 싫은…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숲하루 풀꽃나무 이야기 06] 디딜방아 숲을 거닐다 쑥떡을 먹을 자리를 둘러본다. 맞춤한 바위를 찾았는데, 이 바위 틈으로 나무가 끼인 듯하다. 자라던 나무에 바위가 굴러온 듯하지 않고, 바위가 있는 사이에 씨앗이 떨어져 자란 듯하다. 어떻게 그 틈에서 자랐나 싶으나, 나무하고 바위는 마치 하나인 듯 얼크러지며 오늘에 이르렀지 싶다. 어릴 적에 언덕집에서 살다가 마당이 넓고 디딜방아가 있는 집으로 옮긴 일이 있다. 마을에서는 으레 우리 집에 와서 쌀이나 가루를 찧었다. 엄마도 우리 먹을 쌀을 한 바가지씩 확돌에 나락을 부어서 찧었다. 긴 나무 받침에 두다리가 달리고 길게 뻗었는데, 가루를 빻을 적에는 여주알처럼 생긴 공이를 머리쪽에 끼우고, 쌀을 찧을 적에는 나무공이로 바꾼다. 방아채 가운데 난 구멍에는 대를 끼우고, 대는 두 돌받침대에 얹었다. 엄마가 줄을 잡고 다리를 밟으면 방아가 올라가고, 이때 확돌에 손을 넣고 뒤집으면 엄마가 보고서 발을 뗀다. 박자를 맞추어야 손을 안 다치고 수그린 머리를 안 박는다. 돌하고 나무하고 나무하고 엄마가 한마음이 되어 방아를 찧는다. 오늘 숲에서 만난 바위하고 나무도 한마음으로 살아가는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숲하루 풀꽃나무 이야기 05] 벼랑 보슬비가 내리는 날 칠곡 가산면 유학산에 오른다. 멧길에 안개가 자욱하다. 멧자락에 깃든 절까지 올라가며 바라보는데 바윗덩이가 그대로 멧자락이로구나 싶다. 어떻게 멧갓 하나가 바위 하나일 수 있을까. 그러나 사람 눈으로 보기에 바윗덩이 하나가 멧갓인 모습이 놀라울 테지만, 온누리(우주)로 보자면 이 바윗덩이도 그저 작은 돌멩이 하나일는지 모른다. 깎은 듯한 벼랑 한켠에 선 나무 석 그루를 본다. 떡갈나무이다. 이 나무는 뿌리를 어디로 내렸을까. 바윗덩이에 틈이 있을까. 아니면 나무뿌리가 바윗덩이에 틈을 내었을까. 나무를 넋놓고 바라보다가 그만 이끼에 미끄러지면서 무릎을 쿵 박는다. 아픈 무릎을 쓰다듬으며 바윗덩이에 앉았다. 멧갓인 바윗덩이를 타고 넘은 사람이 여태 얼마나 많을까. 이 멧갓 바위는 나처럼 미끄러진 사람도, 이 멧갓을 두고 싸움을 벌였던 옛사람도, 이 멧갓에서 땔감을 찾던 나무꾼도 오래오래 지켜보았겠지. 2021.05.06. 숲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