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우리말 22 개다 내 몸에 물이 넘칩니다. 콧물로 흘러나와요. 흥하고 코를 풉니다. 코가 시원하게 뚫립니다. 구름이 무거워 웁니다. 작은 물방울로 잎을 적시고 바닷소리를 온땅과 풀잎이 들어요. 하늘을 씻어요. 숲을 씻고 바람을 씻어요. 비스듬히 또는 곧게 내린 빗줄기가 빗자루로 되어 골짜기를 쓸고, 내 눈빛에 스며 핏줄기를 씻어냅니다. 하늘이 눈을 뜹니다. 하늘이 비를 걷고 구름을 걷습니다. 목련이 활짝 펼친 잎으로 하늘을 뽀드득 닦아요. 축축한 흙이 마르고, 마음에 머물던 먹구름이 떠납니다. 노랗게 터트린 개나리 산수유를 만나니, 구겨진 마음을 펴요. 복사꽃 꽃사과 벚꽃이 하늘에서 방긋방긋 웃어요. 하늘이 실눈을 떠요. 흐린 하늘이 드디어 물러갑니다. 물과 바람이 자리를 바꾸어요. 내가 쏟아낸 물은 어디로 갔나요. 내 물이 품던 생각은 또 어디로 갔나요. 어제 찌뿌둥은 또 어디로 갔나요. 갠 하늘과 햇살이 빛납니다.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밥꽃마음 1 누런쌀 논에서 네 손으로 바심한 볍씨 집에서 네 손으로 볍씨를 벗겨 감나무 자루로 들어가는 왕겨 씨눈이 붙어 밝은 누런쌀 담지 누런쌀 겨를 벗길수록 하얀쌀 깎은 쌀겨 쌀눈 가루는 등겨 얼굴에 붙이고 찌개는 걸죽해 소가 먹는 밥이기도 하지 나 오면 흰쌀 두 줌 누런쌀 한 줌 네 혼자 있을 때는 누런쌀 석 줌 꼭꼭 씹어 천천히 먹는 하루 딱딱 턱소리 나도록 오래 씹지 뽀얗게 기름진 흰밥이고 푸스스하고 거친 누런밥 눈으로 보아서는 모르는 온몸 돌며 북돋는 씨마음 2024.04.26. 숲하루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우리말 21 쿵 둘이 나들이 갑니다. 짝은 바퀴 달린 가방을 처음 끈다면서 싱글벙글합니다. 마녘으로 네 시간을 차를 몰아요. 짐을 풀고 가자지만 한 군데 돌자고 했어요. 갯벌에 깨금발로 들어가 물신을 신고 건지는 감태를 보는데 짝은 내리지 않아요. 볼 것 없다고 퉁명스럽게 말해요. 섬에 오기로 하고 섬에서 방을 얻기로 했는데 혼자서 덜컹 먼 곳에 방을 잡았어요. 어디를 가더라도 하루 두 시간을 길에서 보내야만 해요. 첫날부터 쿵 부딪쳐요. 소리 없이 쿡 지어 박혀요. 왔다갔다 힘만 든다며 맘대로 볼 곳을 바꿉니다. 하룻밤 입을 꾹 닫아버렸어요. 청산섬에서 자전거를 탑니다. 도솔암 숲을 오릅니다. 짝이 하자는 대로 따르니 엇갈린 말이 사라집니다. 짝이 묻습니다. "첫나들이치고 잘 보낸 거제?" "나들이하는 바탕이 없어요." "처음 오니 방을 좀 멀리 잡았제?" 서툴다는 말에 풀립니다. 쿵 하던 마음이 쿵짝을 맞춥니다. 2024.03.13. 숲하루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우리말 20 만나다 해남에 있는 대흥절을 다녀왔습니다. 그곳에는 어느 이름난 분 글씨가 걸렸습니다. 얼마나 오랜 나날을 이어온 글씨인지 새삼스럽습니다. 이 글씨를 보려고 숱한 사람이 이곳까지 드나들었을 발자취를 더듬습니다. 글씨에는 글로 담은 사람 손길이 있습니다. 뭘 사고서 슥슥 적는 글씨에도, 종이에 붓으로 남기는 글씨에도, 이렇게 절집에 거는 글씨에도, 모두 손으로 스치는 마음이 있습니다. 어떤 마음으로 글씨를 쓰는지 돌아보면, 어느새 낯도 이름도 모르는 이웃을 만날 수 있습니다. 즐겁게 차린 밥을 맛보듯, 반갑게 마주하는 마음을 만납니다. 멀리 나들이를 가면서 스치는 길에서 나무를 만납니다. 내가 사는 곳하고는 다른 나무입니다. 내가 쓴 글로 묶은 책은 어떤 나무였을까요? 나를 반기는 분한테 내가 쓴 책을 건네다가 ‘나한테 와준 나무냄새’를 훅 느낍니다. 마르지 않는 하늘빛처럼 만납니다. 2024.03.12. 숲하루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우리말 19 허탕 뭔가 빠진 듯한 하루하루가 흐른다. 비가 오는 날 자동차를 씻었다고 하면 뒷불을 갈아 주기로 한 곳이 있는데, 어쩐지 헛걸음만 했다. 하루도 아닌 이틀째 헛길이다. 손수 뒷불을 갈지 못 하니 어쩌지 못 한다. 잔뜩 불을 내 본들 나 혼자 괴롭다. 좀 걸어 보자고 생각하면서 냇길을 따라서 천천히 마을책집으로 간다. 처음 닿은 곳은 안 열었다. 그러네 하고 두리번하다가 다른 책집으로 간다. 아기를 돌보는 젊은 책집지기가 일하는 곳은 열었다. 반갑게 절을 하면서 들어간다. 책도 책일 테지만, 숨을 돌리고 마음을 고른다. 얼마 앞서 미끄러진 일을 떠올린다. 어디에 글을 좀 냈는데 떨어졌다. 지난해에도 헛물을 켰고, 올해에도 헛바람만 마신다. 새해에 다시 내 볼까? 이듬해에도 또 떨어지면? 헛발에 헛일에 허탕만 자꾸 치면? 그러면 다다음해에 새로 내도 되겠지. 네 해 다섯 해 씩씩하게 걸어가 보자. 2024.03.13. 숲하루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글님 ] 우리말 18 날개 다리밑에 줄지은 비둘기를 보았습니다. 벼랑에서 바위를 타는 염소가 이 같은 모습일까 싶습니다. 나무가 우거진 숲에서라면 비둘기가 아슬아슬하게 다리밑 틈바구니에 깃들지 않습니다. 나뭇가지에 앉는 비둘기라면 가만가만 노래하다가 훌쩍 날아서 다른 나무에 앉고, 하늘을 부드러이 가로지릅니다. 대구는 서울보다 작아도, 비둘기한테 그리 살갑지 않습니다. 서울도 비둘기한테는 사근사근하지 않겠지요. 나무도 숲도 먼 이 커다란 고장에 비둘기는 어쩐 일인지 우리 곁에 있습니다. 아무래도 먼 옛날에는 대구도 서울도 숲이었기에, 비둘기는 숲이던 이 터를 잊지 못 하는 듯싶습니다. 일이 바빠 책 한 자락 읽을 틈조차 없었습니다. 버겁고 바쁘던 일을 매듭지으면, 이제 책도 읽고 글도 쓰고, 책마실도 다닐 수 있을까 모르겠습니다. 날개를 활짝 펴고서 온하루를 훨훨 누비고 싶습니다. 2024. 3. 2. 숲하루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게 삶으로 87 씨앗에서 삶으로 《씨앗철학》 변현단 들녘 2020.3.13. 뒷산을 내려오다가 나팔꽃씨를 네 알 따서 주머니에 넣었다. 집으로 돌아온 뒤에 창가 흙에 바로 놓았다. 흙을 살살 뿌려서 씨앗을 덮었다. 앞으로 나팔꽃씨는 어떻게 자랄는지 궁금하다. 싹이 트는 모습부터 지켜보고 싶다. 《씨앗철학》을 읽었다. 이 책은 뿌리기, 자람기, 맺기, 이렇게 세 갈래로 이야기를 들려준다. 올봄 개구리가 깨어나던 무렵에 한멧줄기(백두대간)에 간 적이 있다. 문학답사를 하는 모임에서 갔는데, 이때 나는 ‘씨앗집(씨드볼트)’라는 데를 멀리서나마 보고 싶었다. 볼 수 있을지 모임 분들한테 여쭈니, 다들 이곳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듯싶다. 날마다 먹는 밥을 돌아본다. 예전에는 밥을 버리기가 아깝다고 여겼는데, 어느 때부터인가 밥알도 씨앗 한 톨이라는 대목을 떠올린다. 어릴 적에 엄마아빠가 논밭을 지을 적에는 미처 느끼지 못 하다가, 요즈음 들어서야 새삼스레 되새긴다. 씨앗으로 깨어나서 나한테 밥이 되어 주는 쌀알을 고맙게 여기면서 박박 긁어서 한 톨도 안 남기고 먹는다. 《씨앗철학》은, 씨앗이나 사람이나 다르지 않다고 들려준다. 씨앗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우리말 17 잎망울 매화나무 한 그루에 꽃이 활짝 핍니다. 가지 끝에는 잎망울이 알알이 맺힙니다. 활짝 핀 꽃에는 벌이 바쁩니다. 잎망울은 먼저 피어난 꽃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벌이 일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깨어나려고 합니다. 산수유도 잎망울이 벌어져요. 나무는 추울 적에 가지 끝으로 움틔워요. 잘린 가지에 걸터앉습니다. 눈을 감아요. 꽃내음이 향긋이 실려옵니다. 가라앉은 마음이 붕 떠오릅니다. 머리맡에 까치가 노래하고 흙바닥에 신발 미끄러지는 소리, 공을 치는 사람 소리가 들립니다. 바람이 더 살랑입니다. 움츠리다가 옷을 여밉니다. 잎망울은 움츠리지 않네요. 겹으로 여민 꽃잎을 보아요. 핀 날보다 움츠린 날이 깁니다. 잎망울이 터지면 벌은 봄을 데리고 와요. 나뭇가지가 바르르 떱니다. 잎망울이 떨고 꽃잎도 떨어요. 봄은 떨리면서 열리나 봐요. 잎망울처럼 설레며 봄을 기다립니다. 2024. 2. 22. 숲하루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우리말 16 일손 가게를 접습니다. 들인 살림을 몽땅 빼야 해요. 낱낱을 헤아려 덩어리로 묶고 적어 둡니다. 어떤 곳은 내가 미리 찍고 꾸러미에 담습니다. 이 꾸러미를 돌려받아 하나씩 뜯으면 종이에 적힌 대로 보는 셈입니다. 살림을 빼면서 돈이 맞는지 서로 맞추어요. 들일 적에도 하나하나 찍고, 나갈 때도 하나하나 찍습니다. 들어올 적에는 들이는 사람이 밑일을 합니다. 닫을 적에는 내가 밑일을 합니다. 오는 곳마다 꾸러미를 모아 담으려고 여럿이 옵니다. 이런저런 일을 해놓으니 고맙다고 꾸벅 절합니다. 나는 서로서로 섞이지 않게 품을 들이는 하루입니다. 가게를 여는 일도 닫는 일도 품이 잔뜩 들어갑니다. 손이 아프지만, 이 아픈 손으로 허리를 펴라고 톡톡 쳐줍니다. 잠자리에 누워서도 두 손을 서로 주무릅니다. 깍지를 끼고 꾹꾹 눌러요. 손가락 끝마디가 굽도록 손은 억척스럽게 일합니다. 2024. 2. 22. 숲하루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게 삶으로 86 입만 아팠다 《천재 유교수의 생활 5》 아마시타 카즈미 소년 매거진 찬스 옮김 학산문화사 1997.3.15. 《천재 유 교수의 생활 5》을 새해 첫날에 펼쳤다가 덮고서 다시 펼친다. 유교수는 딱히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늘 마음을 열고서 생각을 펼친다. 스스로 곰곰 생각하고 스스로 눈을 뜨고 알아가는 그림을 보여주는데 대단한 끌린다. 가끔 일이 잘 안 풀리거나 답답할 때 이 책을 펼쳐놓는다. 유교수라면 내가 부딪히는 일을 어떻게 맞설까 하는 생각으로 바라본다. 유교수는 뉴스를 보다가 아나운서가 한 말을 따진다. 시나 삶글이라면, 주어를 바로 쓰면 꼬이지 않는다. 신문글은 주어를 흐리거나 조사를 빼서 큰 글씨로 눈에 띄게 올린다. 궁금해서 눌러 보도록 하는 미끼나 덫인 셈이다. 엉터리로 올리고 뼈대로 제목에 쓴 말을 하고 또 하면서 칸을 가득 채우는데 알맹이는 빈다.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이 여섯을 가장 잘 드러내야 할 신문이 아닌가 싶다. 나도 고쳐야 하고. 딸아이 남자친구는 말도 불쑥불쑥 뱉고, 사내여도 머리를 기르고(요새는 사내도 누구나 머리를 기른다지만,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