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딸한테 8 ― 빛 “책 나왔네요? 우리 고장 으뜸가는 신문에 알림글이 나왔어요. 기쁩니다. 올해 여러모로 큰일 하셨지요? 새해에도 힘차게 나아가 보세요!” “책 나왔네? 우예 냈노? 궁금하다. 내도 요새 뭔가 써 보려고 끄적이는데 잘 안 되더라. 용하다. 올해에 시집도 내고 수필책도 냈네? 무슨 좋은 재주가 있어 이리 책을 내노?” 다른 사람들이 쓴 글하고 책만 읽다가 쉰 줄이란 나이에 이르러 시집도 수필책도 한 해에 하나씩 냈다. 한 해가 저무는 날, 두 가지 책을 가슴에 안고서 살살 쓰다듬는다. 내세울 이름이 없을 텐데 책을 둘씩이나 냈네. 내 글이름을 또렷이 새긴 책을 둘을 품었네. 시집은 내가 나한테 주는 빛이라 여겼다. 쉰 해를 잘 살아왔다고 주고 싶은 빛이었다. 수필책은 막내한테 주는 빛으로 여겼다. 큰딸 작은딸은 시골집을 조금은 맛보았어도 막내는 시골집을 모를 수 있겠다 싶어, 막내한테 남겨주는 빛이 되도록 천천히 글길을 여미었다. 새해에는 어떤 빛을 글에 담을 수 있을까. 먼저 두 딸한테 빛을 심어 줄 글을 써 볼까. 이러고서 짝꿍한테도 빛을 건넬 글을 써 볼까. 깊고깊은 밤이 가득한 겨울을 지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어제/숲하루 굴다리로 몰았다 내가 모는 차를 비키려던 아저씨가 오르막 눈길에 넘어졌다 우편배달부는 눈길에 잘 올라갔기에 뒤에서 천천히 가자 여겼는데 잘못했어요 차도 미끄러워 느린데 걷는 길은 더 미끄럽지요 부끄러워요 꽁꽁 얼며 집으로 가는 마음을 걷는 마음을 잃었어요 2022. 12. 25. 숲하루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은딸한테 /숲하루 햇빛이 써놓은 봄날 꽃잎을 꿈에서 보았다 뱃속에서 넉 달 만에 꼼지락 다섯 손가락을 본 이날 너는 첫 끈을 꽉 잡았단다 여섯 달째는 길에서 옷을 고르다가 갑자기 쓰려져서 구급차를 탔고 아기는 걱정없으나 엄마는 피가 모자라고 하더구나 너는 둘쨋끈을 척 잡았네 아홉 달째는 계단에서 굴렀단다 둥실한 배를 움켜잡고 3층부터 열 칸이나 데굴데굴 엎드린 채 미끄러졌지 손등 발등 까지고 부축 받아 실려갔어 가슴이 철렁했지 너는 셋쨋끈을 움켜잡았어 드디어 빛을 보고서 세이레에 젖을 떼고 시골집에 너를 맡겼다 어느 하루는 아기가 숨을 쉬지 않아 할아버지 할머니가 숨이 막혔다지 캄캄밤에 할머니가 업고 찾은 곳에서 손을 따고서야 숨통이 뚫렸단다 넌 다시 끈을 잡았어 언니동생 틈에서 늘 한 걸음 물러나도 지켜보고 참고 곱게 자라 오늘이로구나 이제 또 하늘이 맺은 끈을 잡는가 두 마음 봄꽃나무처럼 피우겠지 늘 나란나란 풀잎이 노래하겠지 꽃마다 하루를 적고 잎마다 오늘을 담고 열매마다 꿈을 얹어 네 다섯 가지 끈을 네 아이한테 살며시 이어주겠지 사랑으로 2022. 12. 25. 숲하루
[ 배달겨레소리 살구 글님 ] 초리야. 한가위는 잘 보냈니? 울산은 큰바람이 지나갔다는데 괜찮아? 더구나 넌 나랏일꾼이라 큰 하늘땅일이 있을 때마다 밤새워 일한다고 했잖아. 그래서 이 디위에는 어떻게 지나갔나 싶어 걱정이 좀 됐어. 그렇지만 우린 서로 아무 새뜸 없는 게 좋은 새뜸이라 여기니 너한테 굳이 손말틀을 걸거나 하진 않았어. 이런 내 마음을 너라면 잘 알 거라 생각해. 이곳 푸른누리는 벌써 방바닥을 뜨끈하게 하고 산단다. 난 올해 한달에 이곳에 온 뒤로 '여기에 여름이 오긴 올까?'라고 늘 궁금했어. 날씨가 추워서 여섯달까지 겨울바지를 입고 살았다니까. 그러더니 갑자기 엄청나게 더워지더라. 여름이 오긴 오더라고. 그런데 여덟달이 끝나가면서 다시 밤낮으로 쌀쌀해지기 비롯했어. 장마가 끝나자마자 가을이 찾아온 느낌이었지. 푸른 잎으로 가득한 줄만 알았던 밤나무에도 어느덧 밤송이가 달리더니 금새 알이 굵어지지 뭐야. 알이 굵어지나 싶었는데 어느새 밤송이가 터지고 알밤이 두두둑 떨어지네. 아... 가을! 가을이 왔어. 난 콧구멍이 벌렁거릴 만큼 가을을 좋아해. 근데 푸른누리에 있으니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다 좋아지네. 이렇게 된 바에 난 모든 철을 다
[ 배달겨레소리 살구 글님 ] 보고 싶은 내 동무 초리에게. 내가 한글이름을 '살구'로 짓겠다 했을 때, 너도 한글이름이 갖고 싶다며 몇가지 들어 달라고 했지. 그 가운데서 네가 고른 건 '초리'였어. '가느다랗고 뾰족한 끝'을 가리키는 '초리'라는 말은 참말로 너에게 딱이었지. 남을 찌르는 말을 잘하는 너를, 벌써부터 네 아우는 '가시'라고 부른다고 했으니 얼마나 찰떡 같냐. 그 이름을, 나는 이제야 불러보는구나. 내가 이곳 푸른누리에 온지 어느새 여덟달이 지났어. 시골에서는 때가 천천히 흐른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어찌 이리도 쏜 화살처럼 빨리 지나가는지 모르겠어. 앞으로 내가 이곳에서 무얼 하고 지내는지, 둘레 사람들에게 글월을 띄워볼까 싶어. 그 가운데 으뜸으로 생각난 사람이 바로 너란다. 우리가 같은 한배곳을 다니다가 일본에 바꿔배움이로 갔을 때, 참말로 많은 글월을 주고 받았는데, 그지? 집안사람들과 떨어져 처음으로 다른나라에서 혼자 지내던 그 때, 네가 보내는 글월은 나에게 얼마나 큰 기쁨이 되었는지 몰라. 그렇다고 그때 외로웠다는 건 아니야. 혼자 있으니까 어찌나 신나고 좋던지! 얼른 이곳 나날살이를 이야기해 줄게. 한달부터 셋달까지는 우리
[ 배달겨레소리 숲노래 글님 ] ‘책숲하루’는 전남 고흥에서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책숲(도서관)을 꾸리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말꽃을 짓는 길에 곁에 두는 책숲에서 짓는 하루 이야기인 ‘책숲하루 = 도서관 일기’입니다. 숲노래 책숲 책숲하루 2021.7.5. 망령 ―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 (국어사전 짓는 서재도서관) 한자말 ‘망령’은 ‘亡靈’하고 ‘妄靈’으로 가르는데, 둘을 한자나 한글만 보고 가름할 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으리라 봅니다. 이런 말을 쓴대서 나쁠 일은 없으나, 어느 한자로 어느 곳에 써야 알맞을까로 머리를 앓기보다는, 곧바로 누구나 알아차릴 만한 말씨를 쓸 적에 더없이 쉬우면서 부드럽고 즐거우리라 봅니다. 이를테면 ‘넋·죽은넋·허깨비·허울·그림자·찌꺼기·찌끼·찌끄러기·부스러기·티·티끌·허접하다·끔찍하다·더럽다·추레하다·지저분하다·꼴사납다·사납다·눈꼴사납다’라 하면 되고, ‘늙다·늙은이·늙네·늙다리·낡다·낡아빠지다·추레하다·벗어나다·넋나가다·넋빠지다·얼나가다·얼빠지다·바보·바보스럽다·모자라다·멍청하다·멍하다·맹하다·엉망·엉터리·어지럽다·어이없다·턱없다·터무니없다·생각없다·흐리다·흐리터분하다·흐리멍덩하다’라 하면 되어요. 이렇게
[ 배달겨레소리 숲노래 글님 ] ‘책숲하루’는 전남 고흥에서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책숲(도서관)을 꾸리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말꽃을 짓는 길에 곁에 두는 책숲에서 짓는 하루 이야기인 ‘책숲하루 = 도서관 일기’입니다. 숲노래 책숲 책숲하루 2021.7.1. 스스로 ―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 (국어사전 짓는 서재도서관) 펴냄터에서 책을 보내 주어서 받았습니다. 받자마자 이웃님한테 부치려고 넉줄글을 씁니다. 고마운 이웃님은 한둘이 아니라, 고마운 분한테 책을 다 부치자면 즈믄(1000)으로도 턱없습니다. 다섯 살 무렵 고마운 이웃하고 열 살 즈음 고마운 이웃은 확 다릅니다. 스무 살 즈음 고마운 이웃은 부쩍 늘고, 서른 살에 마흔 살을 거치는 동안 고마운 이웃은 엄청나게 늘어요. 이쯤에서 생각하지요. 곰곰이 보면 고맙지 않은 분이 없구나 싶은데, 누구한테는 책을 부치고 안 부칠 수 있을까요? 새로 낸 《곁책》에는 마을책집 빛꽃(사진)을 열 나문 담았습니다. 엮음새에 맞추니 열 몇 쪽이 통으로 비더군요. 통으로 빈 쪽을 그대로 두면 느긋할 수 있지만, 어릴 적부터 종이 한 자락을 벌벌 떨면서 쓰던 버릇이 아직 있고(1970∼80년대까지 가
[ 배달겨레소리 글씀이 보리] 동틀 무렵 메가 좋다. 안개가 걷히며 오늘굿이 열린다. 지난밤 꺼내놓을 마음도 없었음을 안다. 이슬 맺힌 메야, 네가 좋다 ! 아무리 모질어도 고개를 방긋 내미는 들꽃들. 무엇인지 고마움에 내눈도 덩달아 반짝인다. 높이 뜬 볕 내리쬐는 메가 좋다. 따스한 품에 숨받이들 녹아든다. 어느새 녹일 것도 다 내 안에 있었음을 안다. 붉게 물든 메가 좋다. 고요한 바람에 따뜻한 네 가슴이 무척일랑 그립다. 이내 뜨거운 마음이 내 안에 있음을 안다. 까맣게 그을린 메가 좋다. 쏟아지는 별을 보며 삶은 빛과 어둠이 함께여서 아름다움을 안다. 이제 한 바퀴 아제 한 바퀴 돌고 돌아 어느덧 내려다보니 우리도 너와 같이 빛이 되어 돌아감을 안다.
[ 배달겨레소리 숲노래 글님 ] ‘책숲하루’는 전남 고흥에서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책숲(도서관)을 꾸리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말꽃을 짓는 길에 곁에 두는 책숲에서 짓는 하루 이야기인 ‘책숲하루 = 도서관 일기’입니다. 숲노래 책숲 책숲하루 2021.6.13. 엑기스 서너 해쯤 앞서 “영어 손질 꾸러미(영어 순화 사전)”를 갈무리하면 좋겠다고 여쭌 분이 ‘엑기스’란 낱말을 놓고 한참 헤매고 힘들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속으로 ‘왜 힘들지?’ 하고 아리송했어요. 그분은 ‘엑기스’가 영어가 아닌 일본말인 줄 알기는 하지만 어떻게 풀거나 옮겨야 할는지 못 찾았다고 하셔요. 일본말이나 영어나 한자말이나 독일말, 또는 네덜란드말이나 포르투갈말이나 에스파냐말을 쓴대서 잘못이 아닙니다. 생각을 안 하는 채 쓰기에 말썽이 됩니다. ‘엑기스’ 같은 얄딱구리한 말씨가 이 땅에 깃들기 앞서도 ‘엑기스란 말로 가리킬 살림’은 이 땅에도 어엿하게 있습니다. 그러니 예전에 살림하던 사람들이 어떻게 가리켰을까 하고 생각하면 돼요. 또는 시골에서 살림하는 사람들 말씨를 헤아리면 되고, 집에서 수수하게 살림지기 노릇을 하던 할머니나 어머니 말씨를
[ 배달겨레소리 숲노래 글님 ] ‘책숲하루’는 전남 고흥에서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책숲(도서관)을 꾸리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말꽃을 짓는 길에 곁에 두는 책숲에서 짓는 하루 이야기인 ‘책숲하루 = 도서관 일기’입니다. 책숲하루 2021.5.29. 리메 리리 ―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 (국어사전 짓는 서재도서관) : 우리말 배움터 + 책살림터 + 숲놀이터 어제 낮에 ‘정비례·반비례’를 다 풀어내고서 오늘은 ‘밀폐·밀폐용기’하고 ‘유원지’를 풀다가 ‘존구자명’이라는 케케묵은 말씨를 손보고, ‘리메이크·리테이크’를 비롯해 ‘리빌딩·리모델링·리폼’에서 한참 헤매다가 매듭짓습니다. 한때는 한자말로 ‘개조·개혁·개정’이나 ‘혁신·혁명’이나 ‘변신·변화’를 썼다면, 요새는 영어 ‘리-’를 붙인 갖은 말이 춤춥니다. 이렇게 한자말하고 영어가 춤추는 사이에서 우리말이 춤추거나 빛나거나 노래한 적은 없어요. 큰일터에서 우리말로 넉넉하게 이야기꽃을 펴면 외려 돋보이리라 생각합니다. 작은가게도 고치거나 손질할 적에 우리말로 즐겁게 알리면 뜻밖에 도드라질 테고요. 아주 쉬워요. 고치니 ‘고치다’고 하고 ‘손질하다·손보다’라 하면 되고 ‘다듬다·가다듬다’나 ‘새로하다·새로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