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달겨레소리 살구 글님 ]
초리야.
한가위는 잘 보냈니?
울산은 큰바람이 지나갔다는데 괜찮아? 더구나 넌 나랏일꾼이라 큰 하늘땅일이 있을 때마다 밤새워 일한다고 했잖아. 그래서 이 디위에는 어떻게 지나갔나 싶어 걱정이 좀 됐어.
그렇지만 우린 서로 아무 새뜸 없는 게 좋은 새뜸이라 여기니 너한테 굳이 손말틀을 걸거나 하진 않았어. 이런 내 마음을 너라면 잘 알 거라 생각해.
이곳 푸른누리는 벌써 방바닥을 뜨끈하게 하고 산단다.
난 올해 한달에 이곳에 온 뒤로 '여기에 여름이 오긴 올까?'라고 늘 궁금했어. 날씨가 추워서 여섯달까지 겨울바지를 입고 살았다니까. 그러더니 갑자기 엄청나게 더워지더라. 여름이 오긴 오더라고.
그런데 여덟달이 끝나가면서 다시 밤낮으로 쌀쌀해지기 비롯했어. 장마가 끝나자마자 가을이 찾아온 느낌이었지. 푸른 잎으로 가득한 줄만 알았던 밤나무에도 어느덧 밤송이가 달리더니 금새 알이 굵어지지 뭐야. 알이 굵어지나 싶었는데 어느새 밤송이가 터지고 알밤이 두두둑 떨어지네.
아... 가을!
가을이 왔어.
난 콧구멍이 벌렁거릴 만큼 가을을 좋아해.
근데 푸른누리에 있으니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다 좋아지네. 이렇게 된 바에 난 모든 철을 다 타 볼 생각이야. 봄도 타고 여름도 타고 가을도 타고 겨울도 타고!
시골에 사니 봄에는 따스한 햇살에 몸이 기지개를 펴는 것 같아서 좋고, 여름엔 우거진 푸나무 잎을 보며 나도 힘을 얻게 되고, 가을은 이 디위가 처음이지만 벌써 냄새부터가 좋고, 겨울은 펑펑 내리는 눈 속을 걸어 자작나무숲에 가서 둘레를 보는 것도 좋아. 그리고 눈 덮인 메에서 잣을 찾기는 무척 쉬워서 난 나날이 잣을 주으러 메에 가곤 했지.
난 이곳에 오기 앞에는 꽃 한 송이, 풀 한 포기도 꺾지 못 했어.
그 아이들도 살아있는 숨받이이고 나와 다를 게 없다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여기에 와서 풀도 많이 깎고 나물도 많이 뜯어야 해서 처음에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이제는 그것도 많이 넘어섰어. 시골에 와서 내가 살아가려면 어쩔 수가 없더라고. 쇠동골에서 만난 하루님이 '푸나무는 누군가 먹어 주길 바라는 숨받이에요'라고 말해 줘서 마음이 많이 가뿐해졌어. 그랬던 내가 이제는 낫질하는 게 가장 재미있다고 말하게 됐네. 사람은 참 무서운 짐승이야. 하하!
이곳 둘레엔 밤나무가 잔뜩이야. 하루하루 달라지는 시골 모습은 질릴 틈이 없더라. 게다가 이곳은 무척 아름다운 곳이야. 너도 꼭 와 보길 바라. 혼자 보기가 아깝다 야.
푸른누리 밤나무엔 아직 푸른빛 밤송이가 가득 달렸는데 저 아래 잣나무 숲 가까이에 있는 나무에는 가랑잎빛 밤송이들이 여러 낱 보여서 밤을 주으러 가 봤어. 터진 밤송이가 꽤 떨어지긴 했는데 밤들이 잘 보이질 않더라. 그 둘레를 보니 땅을 판 자국이 여기저기 있는 게 멧돼지가 와서 먹고 갔나 봐. 짜식, 맛있는 건 알아가지고.
난 태어나서 이제껏 봐 온 밤을 넘어서는, 어마어마한 밤을 이 디위 가을에 보게 될 것 같아 마음이 두근두근해.
오늘 주운 밤을 보여 줄게.
너한테 보여 주려고 장갑까지 벗고 빛박이를 찍어 왔어.
눈물이 찔끔 나올 만큼 고마워하길 바란다.
두 즈믄 스물 두 해. 아홉 달. 열 두 날.
비 온다고 해놓고 안 온 흐린 날.
ㅅ ㄱ.
<밤 셋 언아우>
<으리으리한 밤나무>
<꽃나물 꽃은 그냥 예뻐서 보여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