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숲하루 풀꽃나무 이야기 71] 고추 고추꽃이 핀 자리에 고추가 자란다. 납작하던 노란 씨앗이 고추를 주렁주렁 달고 나왔다. 어린 날에 빨갛게 말린 고추를 가위로 배를 갈아 씨앗을 뺐다. 아버지는 물에 불려 수건에 싸서 싹을 틔웠다. 설이 다가올 무렵이면 싹을 붓는다. 사월이면 한 포기씩 옮겨 심었다가 다시 밭에 심는데, 고추가 자라도 고추 열매는 잘 열리지 않았다. 씨앗집에서 파는 씨앗은 어쩐지 고추가 잘 열렸다. 어머니는 우리보다 고추를 아기 다루듯 돌보았다. 그런데 씨앗에서 자란 고추를 그루갈이 했다. 수북하게 모여 자란 고추를 뽑아서 하나씩 다시 심었다. 작은 그릇에 뿌릴 적에는 뿌리가 꽉 차도록 키웠다. 밭에 옮겨 심고 때를 맞추어 마름앓이에 걸리지 않게 약을 치면 큼직하게 자랐다. 우리는 여름이면 고추밭 골을 한 줄씩 맡았다. 엎드리기도 하고 쪼그리고 앉아서 빨간 고추를 땄다. 나무를 잡고 고추를 따야 하는데 한 손으로 따면 고추가 부러졌다. 어머니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부러진 고추를 고추나무 사이에 숨겼다. 따기 싫으면 풋고추를 따서 색명이라고 속이기도 했다. 비료 자루를 하나 채우고서야 어머니는 머리에 이고 아버지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숲하루 풀꽃나무 이야기 70] 벼바심 어린 모가 여름갈 비바람을 견디고 가을해에 알알이 여물면 벼를 벤다. 요즘은 큼직하고 반듯한 논에 콤바인이 들어갈 길만 낫으로 가돌림 하면 기계가 베고 바심을 하지만, 내가 어릴 적에는 낫으로 했다. 낫을 한 자루씩 들고 줄을 지어 한둘씩 잡고 힘껏 당겼다. 논바닥에 널어놓은 벼를 두 손에 잡힐 만큼 묶어서 수레로 나르고 앞마당에 무더기로 쌓았다. 아랫방 앞에 탈곡기를 놓고 어머니 아버지는 발로 굴리면서 볏단 하나씩 잡고 이리저리 돌리고 펼쳐 돌리며 쓱쓱 문대면 알이 떨어진다. 우리는 두 쪽에 서서 볏단을 하나씩 건네주고 떨어지면 문 앞에 쌓아 둔 벼를 오빠나 아버지가 옮긴다. 벼를 턴 만큼 어머니 아버지 뒤에는 짚이 가득 쌓였다. 아버지가 틀을 잡아 주면 우리는 짚을 마늘가게 앞으로 옮겼다. 오빠하고 나도 탈곡기를 발로 밟아 바심하면 밟는 힘이 여러 볏집이 둘둘 감기고 손이 딸려갔다. 아주 아슬했다. 둥근 머릿빗에 머리칼이 가득 감기듯 기계에 감긴 짚을 하나하나 뜯어냈다. 모터가 들어오고 전기로 돌리다가 다시 경운기가 들어오고는 탈곡기를 경운기 피댓줄(벨트)이 벗겨지지 않도록 똑바로 끼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숲하루 풀꽃나무 이야기 69] 모심기 마늘을 캐고 난 뒤에 아버지가 논을 삶는다. 논에 물을 대고 갈았다. 진흙 논을 맨발로 밟고 소로 갈고 경운기로 갈았다. 볍씨를 뿌려 놓은 논에는 물이 늘 찼고 볍씨가 한 뼘쯤 자라면 모판에서 모를 잡아뽑아 한 줌씩 짚으로 묶어서 삶은 논에 군데군데 던진다. 지게에 담아 나르기도 하고 우리는 두 손에 거머쥐고 맨발로 비틀거리며 논둑에 들어가서 던진다. 아버지하고 어머니가 줄을 잡고 맞추면 던져 놓은 모를 한 줌 빼서 한 손에 들고 서너 뿌리를 떼어내 줄 따라 물에 꾹 눌러 심는다. 다음 줄이 바뀌면 한 걸음 뒤로 물러난다. 앞서 밟은 자리가 깊어 모를 심으면 물에 다 잠기거나, 떠서 물에 둥둥 뜬다. 웅덩이에 흙을 모으고 모를 심는다. 발목과 종아리가 따끔하면 거머리가 붙었다. 검고 미끄러운 거머리가 피를 빤다. 나는 거머리만 보면 소리를 먼저 질렀다. 떼는 일도 징그러웠다. 손으로 빼려 해도 잘 안 빠졌다. 오빠는 거머리가 다리에 붙어도 아무렇지 않게 떼는데 나는 거머리만 붙으면 물논에 발을 동동 구르며 놀라서 뛰쳐나왔다. 장화를 신으면 거머리가 달라붙지 않는데 내가 신을 장화도 없으니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숲하루 발걸음 13] 부지깽이 나는 울보였다. 어머니가 가는 자리마다 졸졸 따라다녔다. 밭에 가도 따라가고 마실가도 따라갔다. 어머니가 눈앞에 없으면 울고 마을을 돌며 찾는다. 하루는 어머니를 찾으러 갔다가 어머니가 마을사람들과 오래 있지 못했다. 나 때문에 어머니는 집에 왔는데 나는 또 밖에서 놀다가 해가 저물어서야 집에 왔다. 대문에 들어서자 어머니는 부엌에서 부지깽이를 들고 “이눔무 가시나” 하면서 문턱을 넘고 마당에 뛰쳐나왔다. 나는 어머니한테 맞지 않으려고 골목으로 내뺐다. 걸음아 나 살려 하고 앞만 보고 달렸다. 긴 골목을 돌고 점방 모퉁이를 돌아 목골 찬이네 앞까지 달음박질쳤다. 어머니는 부지깽이를 들고 “거기 안 서나” 하고 소리 지르며 점방 모퉁이를 돌고 따라오다 뭐라 뭐라 말하고는 따라오기를 멈춘다. 사백 미터 조금 넘는 거리를 쉬지 않고 달렸다. 곧바로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밖에서 서성이다가 밥 먹을 때쯤에 들어가면 부지깽이로 맞는 일은 비껴간다. 나는 열 살 적까지 어머니를 꼼짝 못 하게 따라다니고 떨어지면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학교도 안 간다고 울었다. 그런데 내가 무서워한 사람은 따로 있었다. 광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숲하루 풀꽃나무 이야기 68] 담배꽃 아버지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는데 할아버지는 담배를 피웠다. 팔을 뻗어 긴 곰방대를 입에 물었다. 허리춤에서 주머니를 꺼내 마른잎을 비벼서 가루를 내어 작은 통에 가득 담고 화롯불에 대고 빨면 불꽃이 일지 않고 불이 붙는다. 긴 대로 빨아들여 입에 머금다가 천천히 내뿜는다. 천천히 아껴가면서 오래 피운다. 할아버지 곰방대는 “대꼬바리”라 했다. 우리 집은 밭이 넉넉하지 않아 담배를 심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이 집 저 집 다니면서 잎을 얻어다 피웠다. ‘희연’이라는 이름으로 담배를 자루에 담아 팔았지만 돈 주고 살 만큼은 안 되어 할아버지는 담배 동냥을 했다. 할아버지는 지팡이 없이는 세 발짝도 못 걸었다. 할아버지 방에서 골목까지 걸어 나오자면 한 시간은 걸렸다. 다른 집 할아버지는 들일 밭일을 하는데 우리 할아버지는 하루를 집에서만 가만히 보내자니 얼마나 지겨웠을까. 티브이도 없어 철이네 할머니 하고 길가에 앉아서 이야기하며 담배를 피우며 하루를 버틴다. 할아버지는 배가 고파 하얀바람을 마셨을까. 푸념만 들고 하루를 버티는데 얼마나 힘들까. 어머니가 큰집이나 찬이네 밥을 들에 날라주고 할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숲하루 풀꽃나무 이야기 67] 박달나무 나무는 잎하고 열매를 보면 알기가 쉬운데, 박달나무는 벚나무 참나무 앵두와 잎이 닮았다. 열매는 벌레처럼 생기고 누렇다. 어린 날에 아버지는 이 나무를 베서 홍두깨로 썼다. 낫으로 껍질을 얼추 벗기고 대패로 다듬는다. 잘 사는 집은 공장에서 사고 우리 집은 공장에 갈 살림이 안 되어 나무를 베어서 쓴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다듬어준 홍두깨로 국수를 밀었다. 밀가루를 포대기로 사 놓고 쓰기도 하고 밀밭을 지었다. 디딜방아에 두드려서 밀을 씻어 말린 뒤 국수를 빚는다. 어머니는 양푼이에 가루와 물을 섞어 빨래 치대듯이 두 손으로 반죽을 했다. 나무판에 놓고 홍두깨로 밀고 돌려서 또 밀었다. 동그랗게 펼치는 반죽은 모자 꼴이 나오다가 차츰 봉긋한 가운데를 납작하게 편다. 납작하게 펴면 홍두깨에 말아 손으로 쓱쓱 바깥쪽으로 훑으면 얇고 넓다. 돌돌 만 반죽이 서로 달라붙지 않게 밀가루를 묻혀 가면서 훑는다. 반죽을 보자기만큼 커다랗게 밀면 널어 두고 마실 한 바퀴 돈다. 꿋꿋해지면 착착 접어서 꽁지를 잘라내고 채썰었다. 우리는 꼬랑지를 받으려고 눈이 빠지도록 기다렸다. 꼬랑지를 아궁이에 넣고 불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숲하루 풀꽃나무 이야기 66] 논두렁콩 논두렁 길두렁에 벼가 한 뻠 자라고 콩도 한 뼘 자랐다. 어린 날에 우리 집도 벼를 심은 뒤 논두렁에 콩을 심었다. 논두렁에 풀이 많이 자라 풀을 뽑고 모를 심고 난 뒤 논두렁을 진흙으로 매끈하게 다듬었다. 투박한 손으로 진흙을 매만지고 두렁길만 두고 이쪽저쪽에 손으로 흙에 구멍을 내고 콩을 몇 알 넣는다. 논두렁에 심는 콩은 들일 밭일이 적었기에 알뜰히 심어 콩을 뽑았다. 들일이 바쁘자 풀에 약을 치고 콩을 심자면 일거리가 많았다. 들일이 늘자 열 집이 심는 부피를 혼자 할 만큼 손이 모자라자 논두렁에 콩을 심는 일을 그만둔다. 들일을 가지 못하는 할머니가 있는 집만 풀을 뽑고 논두렁 콩을 심지, 우리 어머니처럼 젊은 사람은 할 틈이 없다. 마늘 고추 사과 작약이 일거리가 많다. 논두렁에 검은콩을 심고 우리 집은 콩나물을 내었다. 고무 대야에 나무를 올리고 구멍 나고 물이 잘 빠지는 그릇에 불린 콩을 넣어 물을 자주 주었다. 햇빛이 들지 않게 두꺼운 보자기를 덮었다. 빛을 보면 콩나물 머리가 푸르게 바뀐다. 햇빛을 보지 않고 자란 콩은 노랗게 웃자라 부드럽고 빛을 본 콩나물은 잔뿌리가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숲하루 풀꽃나무 이야기 65] 박주가리꽃 어린 날에 다니던 마을 앞산 길이 막혔다. 밭으로 내려오니 멧돼지가 내려오지 못하게 그물 담을 쳐서 멧자락을 다 막았다. 풀밭을 밟고 되돌아가다가 박주가리를 둘 만났다. 박주가리가 뒤늦게 영글었는지 풀빛이 도는 작은 열매이다. 껍질이 오돌토돌하고 앞머리는 도톰하고 끝은 가늘다. 눈썹을 닮았다. 덤불에 손을 넣어 박주가리를 하나 땄다. 알이 꽉 차서 부른 배가 벌어졌다. 그 틈을 엄지손으로 벌렸다. 고치처럼 하얀 속에 박주가리 씨앗이 들었다. 촘촘한 깃털로 모였다. 깃털 끝에는 마른 고추씨앗처럼 납작한 씨앗이 붙어 성냥개비를 닮았다. 손으로 조금 떼어내니 빈틈없이 붙은 얇은 알맹이가 미끄러졌다. 몇 집어 씹었다. 깃털이 촉촉해서 입에 넣으면 살살 감친다. 알갱이를 씹으면 겨울에 내리는 눈을 밟는 소리가 뽀드득 난다. 어린 날에 덜 익은 박주가리도 따먹었다. 누렇게 익을 적에 따거나 쩍 벌어지면 하얀 깃털이 마른다. 우리는 바람이 불면 솜털을 날렸다. 하얀 깃털이 햇살에 반짝였다. 박주가리는 껍데기만 터지기를 기다리면서 바람을 맞고 싶었겠지. 메 너머 마을이 궁금할 테고. 촉촉한 깃털은…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사진: 박종덕님] [숲하루 풀꽃나무 이야기 64] 가재 마을 앞뜰 어귀에 느티나무를 지나 오빳골 재 덜 가서 아랫마을로 내 따라 논 따라 길이 갈라졌다. 가는 길로 갈라지는 곳에 냇물이 흐른다. 재 너머 골짜기에서 내려오는 물을 만나 아랫마을로 뻗어가는 냇가는 가재가 있는 개울이다. 냇바닥에는 누렇고 검은 돌과 큰돌 작은돌이 있고 물이 떨어지는 곳에 시멘트를 발라 밑쪽에는 작은 뚝이 있다. 물이 넘쳐 흘러가고 뚝으로 논둑과 냇가에서 자라는 산수유가 늘어서니 언제나 그늘이 진다. 마을 언니 오빠 동생하고 씻으러 가거나 가재를 잡으러 뚝을 따라 물길을 거슬러 올라갔다. 아버지 헌 검정고무신을 들고 갔다. 큰돌을 뒤집고 작은 돌을 들춰 가재를 찾는다. 들춰 본 돌은 제자리에 두고 물이끼에 발이 미끄러지지 않게 비껴 걸었다. 돌 밑에 알갱이 돌에 숨는다. 딱딱한 껍데기에 두 집게발이 통통하게 올라오고 더듬이를 내밀며 느릿느릿 바위틈에서 나온다. 가재 허리에 작은 발이 몇씩 있고 꼬리 가까이에 가로무늬가 있고 뒤집으면 배를 구부리고 부채처럼 꼬리를 펼친다. 구부린 배를 보면 알갱이를 품은 가재도 있다. 나는 손가락보다 긴 굵고 큰 가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숲하루 발걸음 12 맷돌 맷돌 살 돈이 없을 적에는 마을에서 돌려가며 쓰는 돌을 썼다. 맷돌에는 돌구멍이 있어 암놈 수놈을 끼우고 돌린다. 아주 어릴 적, 그러니까 어머니 뱃속에서 맷돌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열아홉에 혼례를 했지만, 방이 하나뿐인 살림이었다. 방 한 칸을 가로 긋고 시아버지인 아픈 우리 할아버지와 함께 썼다. 세간살이라고는 구멍 난 솥하고 숟가락 하나뿐이다. 시집온 그해 아버지가 붉은감 줍자고 해서 재 너머 효선골에 떨어진, 먹기 아까울 만큼 잘 익은 감을 주워서 탑리역까지 이고 가서 팔았다. 돌아오는 길에 감 판 돈으로 새미 못둑 과수원에서 사과를 사서 집으로 오는 길에 불래마을 사람한테 팔고 효선마을 사람한테 팔았다. 그 뒤로 어머니는 두부를 쑤었다. 어머니가 살던 가음 장터에 가서 두부 쑤는 길을 배우고 찐빵도 배웠다. 마을에서는 새신부가 친정 간 줄도 모르고 달아났다고 헛소문이 났단다. 오는 길에는 가음 장터에서 생선을 떼서 오는 길에 팔고 다시 생선을 떼러 가면 또 달아났다고 헛말이 돌았다. 마을사람은 하나같이 새신부가 못사는 집에 와서 버티지 못하고 달아난다고 말했다. 그럴수록 어머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