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숲하루 발걸음 21] 깨물기 어린 날 우리 마을에는 아이들이 많았다. 가끔은 무리가 갈린다. 골 따라 갈리기도 하고 힘이 센 쪽에 붙기도 했다. 머스마들은 코피가 터지도록 싸움을 하고 가시내들은 머리채를 뜯는다. 나는 옥이한테 머리채를 잡혔다. 닭싸움하듯 씨름하듯 머리를 맞붙이고 서로 머리채를 잡고 씩씩거린다. 머리채를 한 번 잡히면 머리카락이 잔뜩 빠졌다. 머리는 수세 뭉치처럼 헝클어진다. 옥이는 머리 쥐어뜯고 잘 깨물었다. 말로 하다 안 되면 팔을 깨무는데, 깨물린 자리에 이빨 자국이 깊고 시퍼렇게 피멍이 든다. 나는 아파서 울며 집에 왔다. 머리채 잡히는 일보다 깨무는 짓은 나빠 보였다. 그 동무는 집이 끝에 있고 바람막이가 될 언니나 오빠가 없다. 몸집이 남들보다 작아서 억세어 보이려고 꼬집고 물까. 나도 지지 않고 빼앗기지 않으려고 동무한테 받은 대로 오빠하고 동생하고 다투면 깨물고 꼬집었다. 그때에는 왜 깨물어야만 속이 시원했을까. 게다가 울면서 악을 쓰며 깨물까. 주먹이 안 따라주니 깨물고 꼬집었을는지 모른다. 나는 거칠게 노는 아이였을까. 그래도 깨물고 꼬집는 일은 끔찍했다. 2022. 03. 26. 숲하루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숲하루 발걸음 20] 키 우리가 자는 곳에는 벽장이 있었다. 냉장고가 없던 때라 벽장에 넣어 두면 시원했다. 작은 문에 달린 줄을 당기며 연다. 키가 작은 우리는 깨금발을 디뎌도 턱에도 미치지 못했다. 폴짝 뛰면서 안에 뭐가 있는지 무척 궁금했다. 동생 엉덩이를 안고 안을 보게 했다. 그때부터 동생과 나는 벽장 밑에 서서 밤마다 키를 쟀다. 머리에 연필을 올려놓고 눈금을 그렸다. 동생은 벽장 밑에 긋고 나는 문설주 옆에 눈금을 그렸다. 몸을 벽에 딱 붙이고 턱을 당긴다. 처음에는 뒤꿈치를 바짝 당기는데 빨리 크고 싶어서 뒤꿈치를 몰래 들었다. 배에 힘을 꽉 주고 어떻게 하든 키를 늘리려고 애썼다. 자고 아침에 일어나서 재면 더 자랐다. 어머니가 보면 벽종이 더럽힌다고 꾸지람을 해서 눈에 안 띄게 금을 그었다. 눈금이 올라가면 신나서 밥을 더 먹었다. 누워 잠자는 동안 몸을 쭉 펴고 자서 그럴까. 구부러진 몸과 눌린 뼈마디가 제자리로 돌아가서 그렇겠지. 어린 날 우유라도 좀 먹었더라면 내 키가 더 자랐으려나. 마을에 사는 집안 어른이 그러던데, 우리 할아버지도 키가 크고 집안이 다 크다고 했다. 아버지는 어릴 적부터 일을 너무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숲하루 풀꽃나무 이야기 112] 고드름 겨울이면 고드름을 먹었다. 눈이 녹으면서 골이 진 지붕 끝에 뾰족하게 자랐다. 처마까지 팔이 닿지 않아 가마솥이 걸린 뜨락에 올라가 고드름을 땄다. 하나씩 따서 칼싸움을 하고, 또 따서 사탕처럼 물을 빨아 먹었다. 단맛이 아니어도 얼음과자처럼 빨고 우지직 씹어 먹었다. 시린 손을 호호 불며 할아버지 방 아랫목에 손을 넣고 녹이고 할아버지 화로에 손을 쬐며 녹였다. 처마에 달린 고드름이 녹고 지붕에 눈이 녹아 처마 밑에 똑똑 한 방울씩 떨어지면 땅이 파이고 흙이 질퍽하다. 개울이 얼면 얼음이 뿌옇던데, 처마 밑에 달려 얼어붙은 굵은 고드름은 하얗지만 작은 고드름은 속까지 맑다. 눈은 따뜻한 우리 손에 닿으면 뭉쳐 주고 지붕에서 처마로 똑똑 떨어지면 몸을 바꾸네. 물은 다시 쌓여 울퉁불퉁 뻗으며 고드름도 자라네. 어린 날에는 눈도 많이 내리고 처마마다 고드름도 듬뿍 자랐다. 이제 바람 기운이 달라지고 집은 네모난 벽돌집으로 바뀌니 고드름이 자랄 틈이 없네. 고드름은 이제 누구랑 놀고 누가 먹어 줄까. 2022. 03. 09. 숲하루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숲하루 풀꽃나무 이야기 111] 접시꽃 열두세 살 적에 마을 가꾸기를 한 뒤로 마을 어귀에도 꽃이 피었다. 열네 살이 되어 배움터 가는 길이 바뀌었다. 왼쪽 오빳골 재를 넘다가 오른쪽 이웃 마을을 가는 길로 바뀌었다. 우리 마을과 아랫마을 사이에 접시꽃이 길가에 피었다. 집으로 돌아올 적에 우리 마을이 다 보이는 길가에 핀 접시꽃 앞에 멈추었다. 커다란 꽃잎이 분홍빛 빨간빛 하얀빛으로 활짝 피었다. 꽃이 지고 날이 쌀쌀하자 접시꽃이 말라비틀어졌다. 여름날 꽃잎이 촘촘하게 난 골이 부드럽게 하늘거리는 꽃잎이 힘차게 펼치던 꽃이 지고 말았다. 꽃대가 꺾이고 그 틈에 열매가 동그랗게 맺혔다. 열매를 하나 땄다. 누런 잎을 펼치니 옛사람이 쓰던 엽전 꾸러미처럼 동그랗게 꿰어놓은 듯했다. 어머니가 양동이로 물을 기를 적에 머리에 얹던 타래처럼 생겼다. 냄비 받침대 같기도 한 씨앗을 낱낱이 보면 납작하다. 접시만큼 꽃이 커서 이름이 붙었을까. 작은 씨앗이 저렇게 큰 몸집으로 자라날까. 어쩌면 씨앗만이 아는 수수께끼일까. 꽃이 떨어지면 시들어 죽는 줄 알고 보기 흉하다고 여겼다. 죽을힘을 다해 씨앗을 맺는 힘은 어디서 나올까. 물도 없는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숲하루 발걸음 19] 볏단(요구르트 전화) 열두세 살 적에 우리 마을에 전화가 한 대가 들어왔다. 열아홉 살이 되어도 이장 집에 한 대뿐이라 마을사람이 함께 썼다. 교환원을 거쳐 전화가 오면 이장이 누구누구 전화 받으라는 방송한다. 우리는 티브이에 나오는 전화를 보고 작은오빠와 놀이를 했다. 가을에 바심하고 소죽을 끓이려고 쌓아 둔 짚단 구덩이를 두 군데 팠다. 요구르트 빈 통을 성냥불로 구멍을 내고 밑에서 안으로 구멍에 끼워 성냥을 부러트려 묶었다. 실을 어림잡아 길게 풀고 요구르트 통에 두 실을 묶었다. 오빠는 높은 구덩이에, 나는 낮은 구덩이에 들어갔다. 실을 팽팽하게 당겼다. 요구르트 통에 입을 꼭 붙이고 말이 새지 않게 했다. 오빠가 저쪽에서 ‘들리나’ 소리치면 나는 이쪽에서 ‘잘 들려’ 대꾸했다. 말소리가 실을 타고 들리는 듯했다. 나는 쌀을 꼭꼭 씹어 뱉어서 동그랗게 빚은 쌀알을 그릇에 담아 전화놀이를 하면서도 오빠한테 빼앗기지 않으려고 구덩이에서 숨겨 놓고 먹었다. 요구르트 통을 귀에 대지 않아도 우리가 말하는 소리는 그대로 들리는데도 우리는 실을 타고 소리가 오는 줄 알았다. 겨울인데도 우리 집 마당은 다른…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숲하루 발걸음 18] 꽃상여 내가 어릴 적에 우리 마을에는 사람이 많았다. 일흔 집이 모여 살고 한 집안에 다섯이나 일곱씩 살았다. 몇 백이 사는 마을에 죽는 사람도 많았다. 한 달에 몇 판이나 꽃상여가 나갔다. 교회에 나가는 사람들이 종이꽃을 접었다. 꽃을 단 상여는 고왔다. 어른 열이나 넘게 붙어서 어깨에 짊어지는데 상여를 맨 우리 아버지 다리가 휘청거렸다. 옥양목으로 지은 한복을 입고 소리꾼 장단에 맞추어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여러 사람이 발을 맞추었다. 온집안이 지팡이를 하나씩 짚고 뒤따른다. 사내는 ‘아이고’ 소리만 내고 가시내는 서럽게 울었다. 나는 행상이 나가는 모습을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마을 어귀에서 죽은 사람 옷을 태웠다. 옷을 태워 주면 넋이 입고 가라는 뜻이고, 이불은 무거워 짐이 되기에 태우지 않았다. 꽃상여는 마을 안길로 다니지 않고 마을 밖으로 나가 빙 돌아서 산으로 간다. 무섭기도 했지만 죽은 사람을 여럿이 태우고 재밌게 가니 내 눈에는 놀라웠다. 꽃상여가 나가는 날이면 떡이 생기고 고기를 먹으니깐 산까지 따라다녔지 싶다. 아버지는 집에 올 적에 수건하고 고무신을 갖고 왔다. 마을에서는 사람이…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숲하루 풀꽃나무 이야기 110]지렁이 지렁이가 비렁길에 떼로 말라죽었다. 어림잡아 몇 백 마리는 될 듯하다. 비도 내리지 않는데 어디서 몸을 숨기다가 흙도 없는 울퉁불퉁한 비렁길로 나왔을까. 여름 햇볕이 가장 뜨거울 낮에 어디를 가려던 길일까. 나는 지렁이를 밟지 않으려고 요리조리 비껴갔다. 열 살 적에 지렁이를 토막낸 적이 있다. 비가 쌀쌀하게 내렸다. 처마 밑에 웅크리고 비를 구경하는데 지렁이 한 마리가 앞에 지나갔다. 곧게 몸을 뻗고 오그리며 앞으로 나아간다. 좁고 느리게 간다. 보드라운 살결이지만 만지기 싫어 목을 움츠렸다. 아궁이 나뭇가지로 살짝 건드렸다. 내가 건드려도 가던 길 가고 앞을 막아도 머리를 틀어 기어간다. 이러다가 지렁이 허리를 끊었다. 잘린 몸이 꿈틀했다. 피도 나지 않고 한 마리던 지렁이가 두 마리가 되었다. 마디마디 주름이 지고 마디가 끊겨도 죽지 않았다. 비렁길에 흩어진 지렁이는 밟혀서 죽지 않았다. 어린 날 내가 본 지렁이와 빛깔도 달랐다. 먹는 흙에 따라 몸빛이 다른가. 속이 훤히 보이는 여린 맨몸으로 어떻게 땅에서 버틸까. 제가 지나가는 흙이 제 몸처럼 부드럽다는 몸짓일까. 흙을 숨 고르고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숲하루 풀꽃나무 이야기 109] 개복사나무 열네 살에 멧산을 둘 넘고 학교에 다녔다. 집으로 돌아오는 등성이 무덤가 잔디밭을 따라 걷다가 살짝 쉬면서 숨을 고른다. 멧골과 멧골 사이쯤에 복숭아나무가 있었다. 비렁길에 자주 쉬면 복숭아가 바로 보였다. 복숭아를 볼 적마다 군침이 돌았다. 똘기 때부터 눈길이 갔다. 자두보다 조금 굵은 푸른 복숭아에 하얗게 털이 붙었다. 옷에 쓱쓱 닦고 한입 깨물어 맛보지만 쓰다. 먹지 못하는 개복숭아이다. 맨손으로 만지고 옷에 털이 묻어 몸이 가려웠다. 우리 마을에서는 본 적이 없는 열매이다. 어머니가 가끔 사 오는 복숭아 통조림만 먹었다. 절인 복숭아는 부드럽고 걸쭉한 물은 달았다. 우리는 복숭아 열매보다 통조림으로 봉숭아를 맛본 셈이다. 이제 나무로 땔감을 쓰지 않으니 마을 앞산 뒷산 깊은 골짜기에 복사꽃이 활짝 피었다. 사람 손길 없이도 자라 저절로 열매를 맺는다. 어린 날부터 그 자리에 있던 나무이지 싶은데, 땔감을 하느라 복숭아는 구경하지 못했다. 큰오빠가 군대 간 뒤로 복숭아 통조림을 맛보다 어머니는 이웃 탑리 사람한테 흉이 난 복숭아를 얻어 설탕을 넣고 푹 삶는다. 시원하게 두고 여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숲하루 풀꽃나무 이야기 108] 모과나무 들은 말인데, 할아버지는 살림을 많이 물려받았다. 그렇지만 논과 밭을 잘 건사하지 못해 우리 아버지가 태어났을 적에는 알거지가 되었다. 집을 자주 옮기고 옛어른이 쓰던 옆집에 아주 자리를 잡았다. 나는 옆집을 가끔 훔쳐보았다. 흙담 너머로 기와집과 매끈한 마루가 있고 마당에 텃밭을 가꾸었다. 대문은 나무로 짰고 아주 높았다. 대문 위쪽으로는 흙담을 지어 멍석이며 연장을 두었다. 모과를 주우러 가고 숨바꼭질할 적에 옛어른이 살던 옆집에 들어갔다. 내가 뒤안에 간 까닭은 모과 때문이다. 모과나무는 언덕집 나무인데 두 집 사이에 자랐다. 뒷집은 친척이자 오빠뻘과 동생뻘 집이라서 자주 갔다. 뒷집을 가려면 마을을 반 바퀴 돌아야 해서 잔꾀를 부렸다. 우리 담을 밟고 돌 틈에 자란 나무를 잡고 뒷집에 갔다. 뒷집은 마을이 훤히 보이고 담은 어린 내 허리 높이로 조촐했다. 담 곁에 모과나무가 있다. 머스마들은 모과나무에 올라가 놀기도 했다. 나는 노랗게 익은 모과가 너무 갖고 싶었다. 모과가 떨어지면 옛어른이 살던 집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그렇게 내 손에 들어온 모과를 만지면 미끈미끈하고 냄새가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숲하루 발걸음 17] 눈 어린 날 새벽에 눈을 뜨면 문밖이 환한 적이 있다. 달빛에 밝아서 환하기도 하지만 밤새 눈이 내렸다. 잠결이지만 문을 열어 달빛인지 눈이 내렸는지 눈으로 보고 다시 잠든다. 내가 먼저 마당에 눈을 밟고 싶었다. 하얀 마당에 발자국을 내고 신발 자국을 동그랗게 찍는 재미가 있었다. 어떤 날은 아버지가 우리가 자는 사이에 눈을 치워버렸다. 나는 아버지한테 눈을 다 치웠다고 칭얼거렸다. 어떤 날은 발목이 잠기도록 내려서 온 집안이 눈을 친다. 아버지는 눈치는 나무판으로 밀고 삽으로 떴다. 나는 동생하고 작은오빠하고 눈싸움하다가 머리를 맞고 등을 맞고 울기도 했다. 눈싸움이 끝나면 맨손으로 눈을 단단하게 뭉친 다음 눈 밭을 굴렸다. 마당 이리저리 돌면 눈이 뭉치고 차츰 커졌다. 골목으로 다니면서 눈을 크게 굴렸다. 더 크게 굴리다가 부서지기도 하면 다시 굴렸다. 굴린 눈덩이를 포개니 눈사람이 되었다. 나무를 꺾어 코와 눈썹과 입술을 달아주었다. 아버지가 수레에 담은 눈을 골목 끝 도랑에 쏟아부었다. 아버지가 몇 수레 부어 놓은 수북한 눈을 삽으로 탕탕 치면서 고르고 미끄럼타기를 했다. 어린 날에는 눈이 자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