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하루 구름이 기웃거린다 하늘빛이 내려온다 길바닥은 신나게 굴러가고 나는 땅을 소리로 등바닥으로 들으며 빈곳만 지킨다 나무보다 높은 겹겹 집더미인 잿빛 너머로 날아가는 새는 무엇을 찾고 먹고 사는가 네거리에서 올려다보다가 오늘도 앉지 못한 채 어두운 바닥에 들어서서 뒹군다 어느새 가을잎은 지고 별빛 없는 밤하늘에 하루가 누워서 간다 2023.03.28. 숲하루 #열린시학2023봄호 #김정화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찬몸 까치는 우듬지에 짓고 지킨다 겨울에 우듬지는 가랑잎 하나 없어 까치집은 한 방울 비도 비껴갈 수 없다 꼭대기에 홀로 앉아 새끼들 쳐다보던 까치는 이제 떠났다 하늘 열리고 비를 맞는 잔가지 보금자리 조금 춥다 2023.03.09. 숲하루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수국 달빛에 갈아 넣고 떨리는 천둥처럼 놀라며 숨막힌다 고요히 향긋이 걸어나오지 않는다 해도 발걸음은 네 앞에 멈춘다 가만히 보랏빛으로 속삭이다 바람에 흩날릴 때 애타며 녹을 듯해서 문득 굳어버리는 뜻모를 내음으로 나한테 그림이 되었네 오늘 2023.03.09. 숲하루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딸한테 10 ― 수밭고개 2 거미줄에 걸린 참새를 본다 거꾸로 매달렸다 벌써 숨을 거두었을까 조용히 한 발짝 다가선다 가늘게 눈을 깜빡인다 아, 살았구나 살살 거미줄을 끊는다 바닥에 내려놓는다 파닥파닥 곤두박을 치고 쉬잖고 날갯짓을 한다 푸득 하늘로 날아간다 어느새 멀리 사라진다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딸한테 6 ― 책수다 2022년 12월 27일 저녁 여섯 시 서울 방배동 메종인디아 트래블앤북스. 시골에서 나고자라면서 풀꽃나무하고 놀던 나날로 책수다를 편다. 대구에서 서울로 가기 앞서 떨리고 걱정스럽고 조마조마했는데 막상 ‘작가님’ 자리에 처음으로 앉으니 떨리던 마음이 걷혔다. 그래도 미리 적어 온 글을 읽었다. 이미 몸에 아로새긴 삶인데 미리 안 적어 왔으면 말을 못 했을 뻔했다. 둘러앉은 분들도 저마다 어릴 적 시골 얘기를 한 올씩 풀어놓았고 우리 딸아이도 사이에서 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 혼자 말이 너무 많았을까. 북토크는 처음이고 북토크 주인공도 처음이다. 그래 수다를 떨었다. 책수다였으니 말이 좀 많은 쪽이 나았으리라 부끄러운 얼굴을 감춘다. 서울역으로 가서 대구 기차를 타니 확 졸음이 쏟아진다. 내릴 때까지 곯아떨어졌다. 2022. 12. 27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딸한테 5 ― 스물둘 열 몇 해 앞서 장만했지만 좀처럼 입을 길 없던 비싼값 치른 꽃치마를 챙긴다. 옷이 구겨질까 다칠까 살살 달래면서 종이자루에 담았고 택시를 탄다. 스물두 해 만에 와 보는 사진관이다. 챙겨 온 꽃치마로 갈아입는다. 사진을 찍고서 꽃치마는 다시 종이자루에 담는다. 투박하고 값싼 옷으로 갈아입는다. 2022. 07. 22. 숲하루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딸한테 4 ― 햇빛따라 누리책집에 내 책이 들어갔다 “풀꽃나무하고 놀던 나날” 궁금해서 들어가서 보고 잘 있나 싶어 또 가서 보고 좀 팔리나 싶어 다시 가서 보고 자꾸자꾸 들여다본다. 누가 사주는지 몰라도 35, 29, 30, 20, 14 널을 뛰는 듯하지만 무슨무슨 자리에 올랐다는 말에 덩실덩실 궁둥춤이다가 끙 이맛살을 찡그린다. 내가 내 책을 사면 저 자리가 더 올라갈까? 두근두근 내 책을 내가 사 본다. 이튿날 어떤 자리일까? 아니 이렇게 내 자리를 높이면 거짓말 아닌가? 아이 셋을 낳아 돌보며 아이들더러 거짓말 말고 참말 하면서 착하게 살라 가르치지 않았나? 이미 누리책집에서 산 책은 되돌릴 수 없는 짓. 부끄럽구나 어미 된 사람으로서. 2022. 12. 26. 숲하루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딸한테 2 ― 글삯 일을 해서 아이를 돌보았고 일을 해서 집을 마련했고 일을 해서 자가용을 들였고 일을 해서 옷을 산다. 일만 하고 살아온 날을 돌아보다가 우리 세 아이한테 어떤 어머니로 남을까 문득 궁금했고 어쩌면 세 아이는 모두 어머니한테도 삶이 있고 생각이 있고 마음이 있는 줄 모르고 살아갈 수 있겠구나 싶었다. 글을 배우기로 했다. 학교는 다녔지만 학교를 다녔을 뿐, 내 하루를 내 손으로 쓰는 글살림을 배운 적은 없다. 강의나 문학이나 수필이나 에세이 …… 어려웠다. 그러나 뭔가 멋있어 보였다. 그런데 문학이나 수필이나 에세이 여기에 시를 쓰려고 하니 처음 글을 배워서 쓰려던 뜻하고 멀어졌다. 아니, 난 우리 세 아이한테 어머니 삶을 들려주려고 글을 배우려고 하지 않았나? 이름을 내거나 이름을 얻으려고 시인이나 수필가 같은 이름을 바라려고 글을 배우지는 않았는데? 글을 써서 돈을 쥘 수 있을까? 누가 내 글을 내 책을 사줄는지 모른다. 아무도 안 읽고 안 사줄는지 모른다. 첫뜻으로 돌아가련다. 세 아이한테 들려주고 곁님한테 들려주고 우리 아버지 어머니한테 “엄마, 아빠, 내가 이렇게 글을 썼네. 함 보이소.” 하고 띄울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딸한테 9 ― 수밭고개 1 머리가 돌처럼 딱딱하다 자꾸 잠이 온다 집을 나선다 멍하니 대구 시내를 벗어난다 골프장 알림판이 보인다 고개를 돌린다 못가에 선다 둥그런 보랏빛 꽃을 본다 빗물이 내려앉은 꽃잎이다 잔디밭 앞에서 할매가 나물을 캔다 바닥만 보며 고갯길을 오른다 다리를 쉬려고 허리를 편다 고개를 들어 둘러본다 대구 시내에 집집이 빼곡하다 삣쫑삣쫑 소리에 고개를 돌린다 그래 이곳엔 새가 있지 2023. 01. 09. 숲하루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딸한테 7 ― 서울 가는 길 서울에 간다. 책수다를 하러 간다. 작은딸 꽃잔치를 마치고서 새로 책이 나왔고, 이 책을 좋아해 주는 분들이 서울 방배동에 있는 작은 마을책집에서 모인다고 한다. 며칠 몸살을 앓느라 어수선하고, 집안일도 있고 가게일도 있는데, 무슨 옷을 입을지도 망설인다. “딸아, 뭘 입어야 하겠노? 뭘 입어야 나아 보일까? 시골스럽지 않을까? 아니, 시골스럽게 입어야 할까?” 내 책을 읽어 줄 사람을 만나러 간다. 내가 쓴 책에 내 이름을 또박또박 쓰고서 얼굴을 마주할 자리에 간다. 대구에서 서울 가는 기차표를 끊으면서, 서울서 대구 돌아가는 기차표도 끊는다. 그래, 난 멧길을 오르내리며 즐거운 하루이니 멧신으로 하자. 기차를 내리고서 지하철을 갈아탄다. 대구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로 붐비는데, 그래도 지나가는 사람들한테 물어물어 방배동 한켠까지 간다. 세 시간 일찍 왔다. 가까운 찻집에 들어간다.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긴다. 코를 힝 푼다. 풀고 풀고 또 푸는데 코가 자꾸 나오더니 검은피도 나온다. “니가 쓴 풀꽃나무 책 잘 봤대이. 책이름처럼 풀꽃나무가 흐르는 이야기가 좋대이. 애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