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우리말 11 설거지 나는 밥을 짓습니다. 눌은 판을 불에 올립니다. 짝은 옆에서 무를 갈다가, 어느새 눌은 찌꺼기를 벗겨 놓습니다. 이밖에 다른 설거지를 옆에서 뚝딱뚝딱 하는군요. 집에서 큰일을 치르고 나면 개수대가 수북합니다. 언제 이 설거지를 다 하느냐 싶지만, 곁에서 거드는 손길이 있으니 하나둘 사라집니다. 국을 담던 나무그릇도, 지짐이를 올린 나무접시도, 술을 올리던 그릇도, 하나하나 비누 거품을 내고서 헹구고는 마른행주까지 써서 반들반들 닦아 놓습니다. 나는 밥을 짓다가 흘금흘금 구경합니다. 설거지뿐 아니라 비질에 걸레질도, 빨래에 옷개기도, 살림을 치우고 돌보는 모든 일도, 혼자보다는 둘이서 거뜬히 가볍게 후딱 할 만합니다. 예전에 울 엄마는 쌀뜨물로 그릇을 부셨어요. 구정물을 버리고 맑은물로 한두 벌 헹구고서 마당에 나비물을 뿌렸지요. 오늘 나는 둘이서 짓는 부엌살림을 누립니다. 2024. 1. 31. 숲하루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게 삶으로 79 어린나무는 《나무를 심는 사람》 장 지오노 마이클 매커디 판화 김경은 옮김 두레 1995.7.1. 되살림쓰레기를 내놓다가, 헌책을 묶은 꾸러미에 있는 《나무를 심는 사람》을 보았다. 아직 읽어 보지 않은 책이다. 책은 멀쩡하다. 고맙게 건사해서 읽어 보았다. 어느 날 어느 사람이 나무 한 그루를 심고는 오랜 나날을 돌보고 아낀다. 긴긴 나날이 흐른 끝에 푸르게 우거진 숲을 이룬다. 작은 책에 담긴 작은 줄거리는 투박하다. 그러나 숲을 이루기까지 흐른 나날은 짧지 않으리라. 메마르고 거친 벌판에 나무를 심으려는 마음이 먼저 있고, 이 나무를 돌보려는 마음이 차츰 자라고, 어느새 잎그늘이 퍼지면서 풀도 돋고 풀꽃도 피어날 수 있다. 내가 일하는 가게 곁에 그늘진 모퉁이가 있다. 이곳에 어느 날 단풍 새싹이 올랐더라. 추운 날씨에 그늘진 모퉁이 단풍 새싹은 잘 견딜 수 있을까. 어린 나무싹이 걱정스러워서 따뜻하고 볕이 잘 드는 곳으로 옮겨 주었는데, 오히려 시들시들하다가 죽었다. 싹나무는 내 걱정과 달리 겨울 추위를 잘 견디었을는지 모른다. 겨울에 추위를 견디는 힘으로 뿌리도 줄기도 곧게 뻗었으리라. 《나무를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우리말 10 언손 물꼭지에서 똑똑 떨어지던 물방울이 얼어붙습니다. 옆칸에서는 찬바람이 나옵니다. 한자리에 서서 나물을 만지면 손이 시리고, 무를 싸던 손바닥이 얼얼합니다. 호호 입김으로 손바닥을 녹이고 손등을 비비고 볼에 댑니다. 겨드랑에 손을 넣고 오금에도 찔러서 녹입니다. 차가운 손을 짝꿍 목덜미에 쑥 집어넣어 놀래킵니다. 어린 날에는 못에 낀 얼음을 깨고 말을 건졌어요. 눈밭에서 썰매를 타고 미끄럼발도 탔고요. 들녘에서 연을 날리고 눈사람을 굴리고 눈싸움을 하다가 처마에서 고드름을 따면 두 손이 벌겋게 얼어요. 화끈거리고 얼얼하고 가려워 손이 떨어져 나가는 듯해요. 아랫목에서 손을 녹여요. 할아버지 불담이불을 쬐고 모닥불에 녹여요. 이윽고 뜨개실과 코바늘로 벙어리손끼개를 짜는데, 그래도 엉덩이 밑이 가장 따뜻해요. 손이 얼며 뛰어놀았고 손이 어는 줄 모르고 일합니다. 몸은 걸어다니는 구들입니다. 2024. 1. 30. 숲하루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게 삶으로 78 나비물 《아나스타시아 1》 볼라지미르 메그레 한병석 옮김 한글샘 2021.1.25. 《아나스타시아 1》를 읽는다. 열 자락 가운데 둘째와 여섯째를 먼저 읽었다. 이제 첫째를 읽어 본다. 《아나스타시아》는 우리가 잃어버린 길과 마음을 짚는다. 첫째, 우리는 꿈을 잃었고, 꿈을 잃었기에 숲을 잊어버리는데, 숲을 너무 오래 잊은 채 등지다 보니 숲을 나란히 잃었다. 둘째, 우리는 사랑을 잃었고, 사랑을 잃었기에, 입으로는 사랑타령을 하고 몸을 섞지만, 정작 사랑이 아닌 사랑 흉내에 그치는 탓에, 아이들이 사랑을 받아서 태어나지 못 한다. 이 책은 아주 쉬운 이야기를 부드럽게 들려준다. 얼핏 나무라는 듯 보이지만, 곰곰이 새기고 보면 나긋나긋하게 달래면서 알려주는 길잡이 같다. 이 길잡이란, 옛날부터 모든 엄마아빠가 해온 일이겠지. 사랑으로 집을 짓고, 사랑으로 밥을 짓고, 사랑으로 옷을 지어, 사랑으로 한 집안을 이룬다. 아이들은 마음껏 뛰놀고, 어른들은 기쁘게 일한다. 이런 곳은 언제나 숲 한복판이거나 곁이었다. 손수 집과 밥과 옷을 짓는 터전은 내내 숲이었다. 사랑으로 짓고 돌볼 적에는 아플 일이 없다. 사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우리말 9 서툴다 조금만 바꿀 뿐인데 얼굴빛이 따뜻하게 보입니다. 아니, 마음을 바꾸면 얼굴빛도 매무새도 다르게 보입니다. 처음 하는 일은 누구나 서툴지만, 스스럼없이 하면 늘 새롭게 배우면서 씩씩합니다. 입술을 바르고 볼을 하얗게 발라야 예뻐 보이지 않습니다. 맨낯으로 해를 보고 바람을 쐬고 물로 씻을 적에 튼튼하면서 싱그러워요. 생각해 보면, 얼굴을 꾸미느라 품을 안 들이니, 마음을 가꾸는 일에 품을 들일 만합니다. 옷을 곱게 차리는 데에 마음을 안 기울이니, 일손이 좀 서툴더라도 언제나 즐겁게 배울 만합니다. 섣불리 나서니까 서툴어요. 서툰데 밀어붙이니 싸워요. 싸우니 시끄러워요. 아직 잘 모르니 물어보면서 하나하나 배워요. 하나씩 배우니 천천히 가닥을 잡아요. 하고 해보고 다시 하는 동안 손발을 맞추고, 마음에 담을 생각을 북돋웁니다. 물이 흐르듯 말을 하고 싶고, 물빛으로 말빛을 돌보고 싶습니다. 2024. 01. 07. 숲하루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게 삶으로 77 삶터 《생쥐와 고래》 윌리엄 스타이그 이상경 옮김 다산기획 1994.9.10. 며칠 앞서 《생쥐와 고래》를 장만했다. 아들이 어릴 적에는 무릎에 앉혀 놓고 그림책을 날마다 읽어 주었는데, 벌써 스무 해가 지난 일이다. 이제는 그림책을 들어줄 아이도 없지만 사서 읽는다. 짝한테 읽어 주고 나도 읽을 마음인데, 마음처럼 쉽지 않다. 《생쥐와 고래》를 보면, 처음에 생쥐 혼자 나온다. 뭍은 생쥐한테 이미 드넓은 터전일 테지만, 훨씬 드넓을 바다를 누비고 싶다는 꿈으로 손수 배를 뭇는다. 배를 뭇는 동안 틈틈이 여러 살림을 장만한다. 배를 타고서 너른바다를 얼마나 오래 누빌는지 모르니, 먹을거리에 여러 살림을 넉넉히 챙긴다. 드디어 배를 다 무은 어느 날, 생쥐는 혼자서 길을 나선다. 배도 혼자 무었고, 살림도 혼자 장만했다. 바다마실도 혼자 나선다. 낮바다를 누리고, 밤바다를 지켜본다. 별이 쏟아지는 밤바다에 고즈넉이 누워서 별바라기를 하다가 잠들기도 한다. 이러던 생쥐는 그만 뱃전에서 미끄러진다. 바다에 풍덩 빠진 생쥐는 아차 싶으나, 배는 생쥐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 끝도 없을 바다에 홀로 둥둥 뜬 생쥐는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우리말 8 새해 우리 집 다섯 사람 가운데 짝꿍하고 막내가 미르해에 태어났습니다. 2024년은 미르띠요, 미르 가운데 파란미르라고 합니다. 섣달그믐에도 새해첫날에도 새녘에서 해가 뜹니다. 묵은해를 보내면서 넙죽 절을 하고, 새해를 맞이하면서 납죽 절을 합니다. 지나간 일은 잠재우고서 새롭게 만나자고 두런두런 말을 나눕니다. 지난해에 못 이룬 다짐을 새해에는 천천히 풀어 보자고 생각합니다. 사흘을 못 넘기고 허물어진다면, 다시 다짐하면서 나흘을 넘겨 보렵니다. 나흘 만에 또 무너지면, 또 다짐하면서 닷새를 넘겨 보렵니다. 집일도 가게일도 술술 풀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겨울이 가면 봄이 오듯, 한 해가 저물기에 새롭게 1월 1일부터 열듯, 집안살림도 가게살림도, 글살림도 즐겁게 여미자고 생각합니다. 새롭게 한 줄을 쓰는 이 마음 곁에 새가 찾아와서 노래를 부르면 좋겠어요. 2024. 01. 11. 숲하루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게 삶으로 076 집이라는 곳 《초원의 집 2 대초원의 작은집》 로라 잉걸스 와일더 글 가스 윌리엄스 그림 김석희 옮김 비룡소 2005.9.25. 《초원의 집 2》을 읽는다. 미시시피강이 꽁꽁 얼 적에 건너려고 추운 겨울에 집을 옮기는 이야기가 흐른다. 마차에 살림을 싣고서 간다. 마차에서 자고 풀밭에 옷을 말린다. 마차는 움직이는 집이다. 드디어 맞춤한 곳을 찾아내고서는, 너른들에 집을 작게 짓는다. 통나무를 베어 하나씩 올리고, 마차 덮개로 먼저 지붕을 삼는다. 이윽고 널빤지를 늘리고, 말이 머물 곳도 짓는다. 모든 일은 한집안 모두 힘을 모아서 한다. 내가 어릴 적을 돌아본다. 마을에서 곧잘 집을 옮겼지만, 마을을 벗어난 적이 없다. 내가 아이를 낳고 집을 꾸린 뒤에도 고장을 떠나지 않았다. 일터 가까이 살림집을 얻었다. 대구로 옮기면서도 짐을 거의 옛집에 두었다. 옷가지만 갖고 대구로 왔는데도 집안에 온갖 살림이 가득했다. 예전에는 살림살이가 적었을는지 몰라도, 네 식구가 마차를 타고 집처럼 누리면서 옮기는 길은 만만하지 않았을 텐데. 가만히 읽어 보자니, 《초원의 집》은 내가 열 두 살 무렵에 티브이에서 보았다.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게 삶으로 75 말이라는 빛 《인간과 말》 막스 피카르트 배수아 옮김 봄날의 책 2013.6.24. ‘언어’라는 한자말을 어떻게 풀어서 쓰면 좋을는지 헤아리다가 《인간과 말》을 펼친다. 열 달쯤 앞서 읽은 책인데, 다시 펼치니 책 귀퉁이를 접어놓은 자국이 꽤 많다. 말에는 몸이 없다. 어려운 이야기도 쉽게 풀면 듣거나 읽기에 좋다. 자칫 어렵기만 할 수 있는 길을 나긋나긋 풀어낸 책이 아닐까 싶다. 문득 생각해 보니, 말이란 우리 스스로 몸을 짓는 길일 수 있겠다. 갓 태어난 아기는 말보다는 몸짓으로 받아들이면서 하루하루 겪고 물려받고 배운다. 말에 앞서 몸이 있는 듯하다. 몸으로 겪으면서 알아가고, 마음에 맺은 멍울을 하나하나 다스리면 어느새 마음이 스스로 낫는다. 어둡게 가라앉은 몸을 씻고, 어둡게 덮는 말을 씻는다. 몸은 좁거나 작은 곳에는 못 들어갈 테지만, 말은 어디에나 들어가고 흐른다. 손끝에서도 입밖에서도 말은 흐르고 들어가고 나오면서 돌고돈다. 숲에 깃든 모든 목숨은 사람한테 머물기를 바란다. 바다는 하늘과 닿을 때까지 판판하게 펼치다가, 어느 날 배가 지나가면 아득하게 물러나 돌아간다. 바다는 사람과 배가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우리말 7 읽는다 아침마다 골마루 꽃밭을 읽습니다. “잘 잤냐?” 손으로 쓰다듬고 물을 뿌려요. 한해살이 풀꽃이 세 해 넘게 숨을 쉽니다. 눈빛과 손빛으로 돌봅니다. 오늘은 어쩐지 어깨가 아픕니다. 찌릿하더니 손끝부터 힘이 툭 떨어져요. 찌릿한 채 하루를 보냅니다. 어깨를 툭툭 털면서 책을 읽다가, 이 글을 쓴 분이 어떤 마음인가 하고 헤아립니다. 나라면 어떻게 글을 써 볼까 하고 생각합니다. 일을 쉴 적에 책을 읽고, 다시 일을 할 적에는 일터만 살핍니다. 짝꿍하고 나누는 말도, 일터에서 오가는 말도, 서로 마음이 오가는 징검다리입니다. 말을 주고받으니 마음을 읽고, 말을 글로 담으니 책이 태어납니다. 늦은저녁에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다시 우리 집 꽃밭을 돌아봅니다. “잘 있었니?” 나는 풀꽃하고 마음을 나누고 싶습니다. 서로 눈망울을 읽고 싶어요. 풀꽃하고 나 사이에 오간 말을 글로 옮기고 싶어요. 2024. 1. 2. 숲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