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우리말 15 나잇값 열한 해 동안 하루도 가게일을 쉰 적이 없어요. 가게를 아주 닫고서 쉴 날을 손꼽아 기다립니다. 둘이 섬에 가고 싶습니다. 둘이 하늘을 날아 이웃나라로 마실하고 싶습니다. 나들이 가방을 한 벌 삽니다. 예전에도 나들이 가방을 산 적 있지만, 그무렵에는 몇 달을 드러눕는 바람에 끌지 못 했어요. 두 딸이 엄마집에 오면 저희 짐을 이 나들이 가방에 담아서 하나씩 갖고 갔어요. 새로 장만한 나들이 가방은 나 혼자 쓰고 싶습니다. 두 딸 앞에서 나들이 가방을 자랑했는데, 이튿날 짝꿍이 꾸지람합니다. 엄마가 그러면 안 된다고 해요. 딸도 쓸 일이 있으면 마음껏 쓸 수 있지 않느냐고 하는군요. 하기는, 나들이를 날마다 다니지 않을 테니, 딸이 빌려쓸 수 있습니다. 그래도 이제는 모처럼 혼자 누리고 싶은 살림이기에 나잇값에 걸맞지 않은, 또 엄마답지 않은, 그렇지만 나다운 마음이고도 싶습니다. 2024. 2. 10.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게 삶으로 85 써주는 글보다는 《모독》 박완서 글 민병일 사진 학고재 1997.1.25. 《모독》은 2018년에 처음 장만했다. 그때 나는 일에 묶여 살았다. 일기도 쓰지 못했다. 집밖이며 나라밖이며 아무튼 바깥이 몹시 궁금할 때 장만했다. 박완서 님은 유럽과 아시아를 가리지 않고 찾아다닌 듯하다. 다 다른 곳이 저마다 자리를 잡고서 꽃을 피운 아름다운 이야기를 쓴다. 빼앗고 빼앗기며 싸우던 숱한 슬픔이 깃든 여러 나라를 기웃기웃하는 이야기를 쓴다. 그런데 이 책을 쓴 박완서 님은 ‘여행을 다녀와서 글을 써주기로 하고 따라가’는 나들이였다고 한다.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여러 나라를 다녀온 셈이다. 게다가 사진사가 붙으니 굳이 품을 들일 일도 없고, 짐도 가벼웠겠지. 티베트는 어떤 나라일까. 글과 사진으로 보자면, 풀이 없고 먼지가 자꾸 일고 높직한 땅이라는데, 한때 집짐승을 키우며 떠돌다 머문 사람들이 불교에 몸을 담고서 마음을 닦는 사람들이 거쳐 가는 곳이라는데, 그곳은 언제부터 사람들이 바닥에 온몸을 엎드려 절을 하면서 나아가는 곳이 되었을까? 이제 티베트라는 나라는 없이 중국이 집어삼켰는데, 무슨 일이 있었을까?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우리말 14 몽돌 바닷가에 옵니다. 드넓은 모래밭을 걷습니다. 그물막 뒤켠으로 모래가 쌓여 작게 덩이를 이룹니다. 썰물로 바닥이 드러나자 몽돌 하나도 드러납니다. 밀물이 밀려오자 몽돌이 모서리만 남습니다. 하염없이 바닷물과 몽돌을 바라보는데, 이 몽돌이 꼭 사람처럼 달리다가 멈추다가 하는 듯합니다. 어릴 적 살던 멧골에는 돌이 참 많았습니다. 바위가 얇은 켜는 살짝 밟으면 부서지기도 했습니다. 돌이 푸스스 떨어지고 떼굴떼굴 굴러가요. 어느 날은 돌을 잘못 밟아 자빠졌어요. 오늘 바닷가에서 보는 납작한 몽돌은 닳고 닳아 둥글둥글 구릅니다. 몽돌은 물결을 타면서 놀이를 하듯 일어났어요. 물살에 휩쓸리다가 바람을 잡아당기며 웃어요. 뾰족하면 ‘모서리’인데, 물과 바람에 모를 깎으면 ‘몽톡’하다고 해요. 모가 나면 뾰족하지만, 세모나 네모는 든든히 서요. 모를 지우면 신나게 구르며 놀고 노래해요. 2024. 2. 7. 숲하루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게 삶으로 84 책을 보듯이 《천재 유교수의 생활 4》 야마시타 카즈미 신현숙 옮김 학산문화사 1997.2.25. 《천재 유교수의 생활 4》은 아줌마와 학생과 애인과 노인과 고양이를 바라보는 눈길을 다룬다. 유교수는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 사람을 만나면서 생각을 얻는다. 달려가는 학생을 앞지르면서 ‘앞의 풍경’을 보는 기쁨을 얻고, ‘뜨거워진 손으로 책장을 넘기면서 앞에 펼쳐진 모습을 만나는 책읽기’를 하자고 다짐을 한다. 나이든 분을 만나 말동무가 되어 주면서 ‘오늘 이곳에서 배우고 즐기’는 하루를 살자고 여긴다. 가게에 가서 품을 들여 무를 고르면 곧잘 다른 아줌마가 끼어들어 낚아채곤 한다. 모든 아줌마가 이러지는 않을 텐데, 이렇게 밀치는 아줌마가 하는 짓을 보면, 이분은 둘레도 안 쳐다보지만 그분 마음속부터 안 들여다본다고 느낀다. 그런데 값싸게 뭘 사더라도 다른 데에서 흥청망청 쓴다면, 무 한 뿌리를 싸게 산들 무슨 이바지를 할까. 큰가게에 가 보면 줄을 길게 서서 더 싸게 사려는 사람들이 물결친다. 나는 이런 긴줄을 보면 돌아나온다. 왜 줄까지 서면서 더 싸게 사야 하는지 모르겠다. 기다리는 품이 아깝고, 기다려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게 삶으로 83 서로 들려주는 말 《나무의 말이 들리나요?》 페터 볼레벤 장혜경 옮김 논장 2020.6.15. 《나무의 말이 들리나요?》는 숲이 집인 나무가 살아가는 이야기가 흐른다. 숲에 몸을 숨기며 먹고사는 짐승과 벌레 이야기가 나온다. 나무가 뿌리내린 바닥에서 버섯이 하는 일을 다루고, 나무에 깃드는 새 이야기를 두루 다룬다. 짐승과 새도 말을 하고 짝을 찾는다. 사람들은 새가 하는 말을 울음으로 여긴다. 나무는 나뭇잎으로 냄새를 퍼뜨리고, 나무냄새는 바람을 타고서 먼 이웃나무한테 스민다. 땅밑에서는 뿌리끼리 서로 이야기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나뭇잎이나 나무뿌리가 주고받는 말을 알아듣지 못 하기 일쑤이다. 도시에 집이 잔뜩 들어서고 찻길을 닦느라, 숲이 야금야금 잘리고 사라진다. 숲에 사는 나무를 도시 한쪽에 옮겨심고서 공원을 꾸민다. 찻길을 따라서 한 그루씩 드문드문 심은 나무는 외로워 보인다. 잿빛이 가득한 높다른 마을에는 나무를 조금 심어서, 사람도 쉬고 새도 깃든다. 겨울이 떠나고 봄이 찾아오는 3월에, 나라 곳곳에 꽃구경 이야기가 올라온다. 오늘 수목원에 가 보았다. 잎을 떨군 가지에 갓 새싹이 눈을 틔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게 삶으로 82 글쓰기 길잡이 《우리말꽃》 최종규 곳간 2024.1.31. 《우리말꽃》을 펼친다. 겉 종이에 '꽃' 글씨 하나가 꽉 찼다. 눈에 확 띄게 썼을까. 궁금해서 얼른 여는꽃을 읽는다. 글쓴이는 책이름처럼 ‘여는말’이 아닌 ‘여는꽃’이라는 이름을 새로 지었다. 이 ‘여는꽃’을 읽으니, 글쓴이가 걸어온 길이 죽 흐른다. 어릴 적에 인천 바닷가에서 놀며 들은 말에, 이오덕 어른이 남긴 글을 추스르면서 이웃에서 만난 연변사람 말씨를 들은 하루에, 이제 전남 고흥 시골로 옮겨서 새·풀꽃나무·비바람·흙·별을 동무하는 삶을 말빛 하나로 옮긴다고 한다. 여는꽃 다음으로 닫는꽃도 읽어 본다. ‘여는꽃’이 여는말이듯, ‘닫는꽃’은 닫는말이다. 무슨 책을 맨앞과 맨뒤부터 읽느냐고 할 수 있지만, 열고 닫는 말이 글쓴이 마음을 스스로 간추려서 들려준다고 여겨서 둘을 먼저 읽어 버릇한다. 《우리말꽃》을 쓴 사람은 ‘국어학’이라는 일본말을 쓰기보다는, 우리가 우리 마음을 우리 말글로 담을 적에 스스로 꽃처럼 피어나리라 여겨 ‘우리말꽃’이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나 같아도 ‘국어학’이라고 하면 너무 어렵겠다. 우리말꽃, 여는꽃, 닫는꽃,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글님 ] 우리말 13 늦겨울 비 봄을 몰고 오는 비입니다. 어제 봄맞이(입춘)였습니다. 아침에 내리는 이 비는 봄을 그리는 비이면서 겨울을 보내는 비입니다. 늦겨울비이고, 이른봄비입니다. 구름이 아침해를 가려 어둡고 찌뿌둥합니다. 내내 이불을 뒤집어쓴 채 쉬고 싶은 날입니다. 늦잠꾸러기이고 싶습니다. 찬비는 흙을 흔들어 풀을 깨우고 나무를 깨우고 꽃망울을 깨웁니다. 장대비처럼 세차지 않아요. 가랑비처럼 부슬부슬 내립니다. 하늘을 말끔히 씻고 뿌연 먼지를 닦아요. 맵찬 바람이 슬그머니 꽁무니를 빼면 한 꺼풀 누그러져요. 비 오니 날궂이 해요. 배추지짐 먹고, 수꾸떡 먹어요. 겨우내 자란 새싹을 모판에 옮겨심어요. 처마에서 작대기도 다듬고, 집안에서 쉽니다. 비는 겨울머리에서는 추위를 부추기지만, 여름머리에서는 무더위를 식혀요. 철이 바꾸는 비입니다. 섣달그믐을 지나가는 늦겨울비를 보며 묵은 마음도 씻어냅니다. 2024. 2. 7. 숲하루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게 삶으로 81 떠난 사람을 헤아리기 《애도일기》 롤랑 바르트 김진영 옮김 걷는나무 2012.12.10. 나는 어릴 적에는 걸핏하면 울었다. 그렇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에도, 사흘 뒤에 무덤에 들어갈 때도, 나는 엄마처럼 오빠처럼 소리내어 울지도 않았다. 마음은 슬프나 눈물이 맺히기만 했다. 아파서 누운 아버지를 보니 차라리 잘 가신다고 생각했다. 세 해 동안 아버지 생각이 날마다 났다. 《애도일기》를 여섯 달 앞서 장만해서 다시 펼친다. 글쓴이는 어머니 죽음을 슬퍼한다. 글쓴이는 슬퍼하는 날이 열여덟 달을 넘으면 안 된다고 말한다. 한 사람을 떠나보내고 잊는데는 빨라도 한 해가 넘고, 어떤 사이냐에 따라 슬픈 너비가 다르다. 가장 큰 슬픔이 아마도 어버이를 잃거나 짝을 잃은 슬픔이 아닐까. 흔들리는 빈자리는 어버이보다 아이를 낳고 보금자리를 이룬 사람이 아닐까. 나쁜 사이로 지냈다면 시원할 테지만 살갑게 지낸 사이라면 빈자리가 크게 느껴지리라. 짝꿍은 짝인 나보다 어버이가 먼저이다. 어제저녁에는 살짝 서운했다. 가게를 언제 넘길지도 몰라 힘이 빠지다가도 시골 친척 땅에서 ‘자연인’처럼 사는 꿈에 부풀었다. 창이 큰 농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글님 ] 우리말 12 겨울나기 겨울을 앞두면, 우리 어머니는 으레 빨간김치 하얀김치를 독에 담습니다. 처마 밑에는 무잎과 배춧잎을 널어서 시래기로 말려요. 아버지는 여름에 나무를 베어 말려요. 톱으로도 도끼로도 땔나무를 쪼개요. 멧골짝 겨울은 더 일찍 오고 더 춥습니다. 어릴 적에는 이렇게 추운 날씨에도 엄마아빠가 장작을 피워서 밥을 짓고 물을 데우고 소죽을 끓이고 메주를 쑤고 조청을 고고 두부를 찌고 팥죽을 끓이고 호밤벅벅을 했어요. 나는 이 곁에서 말랑감에 고욤에 배추뿌리에 고구마를 겨우내 주전부리로 삼으면서 산수유를 바수었습니다. 문득 돌아보면, 오늘 나는 대구라는 큰고장에서 딱히 대수로이 겨울나기를 하지는 않습니다. 장작을 안 패도 겨울 걱정이 없어요. 매운바람에도 꽃눈이 부푸는 겨울 끝에 겨울나기를 돌아봅니다. 이미 겨울은 저물어 가지만, 어떤 살림으로 새해를 맞이했는지 되새깁니다. 2024. 2. 4. 숲하루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게 삶으로 80 고비 《아침의 피아노》 김진영 한겨레출판 2018.10.5. 《아침의 피아노》를 여섯 달 앞서 처음 읽을 적에는 깜짝 놀랐다. 글쓴이는 롤랑 바르트가 쓴 《애도일기》를 옮겼는데 두 책이 비슷한 글감이다. 《애도일기》는 옮긴 말씨가 썩 안 좋다고 생각했는데, 《아침의 피아노》는 좀 다르다. 죽은 어머니를 슬퍼하는 옮김책은 슬프고 슬프다는 말만 헛되이 맴도는 알맹이 없는 멧울림으로 읽었다면, 《아침의 피아노》는 글쓴이가 죽기 사흘 앞서까지 적은 글이다. 이제 몸을 내려놓고서 떠난 글쓴이는 ‘물가에 앉았다. … 생이 음악이라는 것도 알겠다’ 하고 적는다. 어쩐지 이 말에 뭉클했다. 삶이 노래라는 말이 왜 내 마음에 와닿았을까 하고 돌아본다. 노래는 즐거운 노래도 있지만, 슬프거나 아픈 노래도 있다. 활짝 웃고 춤추는 노래고 있지만, 눈물에 젖으면서 처지는 노래도 있다. 요즘 우리 집은 웃음노래가 아닌 눈물노래를 닮았다. 아니, 요 몇 달은 눈물노래를 잇는다. 열한 해를 이어온 가겟일을 접는 마지막판인데, 일도 더 많고, 마음을 쓸 곳도 너무 많고, 지치고 힘든 일은 그야말로 넘친다. 우리 엄마가 언젠가 한 말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