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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삶 88] 다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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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은삶 88] 다녀왔습니다.

 

여럿이 나들이 가면 들뜰 텐데 차분하다. 멀미약을 안 먹어야 머리가 맑은 줄 알면서 먹는다. 뭔가 모르겠지만 요사이 멍하고 굼뜬다. 웃음도 무디고 느낌도 무디다. 나루터를 보고 등대를 보아도 그저 그렇고 바람이 머리칼을 마구 날려도 무덤덤하다. 나보다 나이가 더 들어도 혀를 꼬며 귀엽게 말을 하고 까르르 웃고 나비처럼 팔랑팔랑 다니는 사람들이 많다. 사진을 찍는다면 팔을 착 뻗고 소리치고 몸짓이 저절로 나오기도 한다. 내 안에 있는 다른 내가 느긋하게 구는 듯하다.

 

오르막 숲길이다. 판판한 들녘이 펼쳐지고 나무가 우거졌는데 이 꼭대기에 가야 고래불바닷가를 본다니 오르면서도 잘못 오르는 길이 아닐까 갸우뚱하면서 계단을 오른다. 이제 신바람이 살짝 나는데 몸은 아직 무겁다. 종아리에 돌덩이를 하나 달아 놓은 듯 당긴다. 재잘거리는 사람보다 앞서 걷는다. 숨을 고르며 뒤돌아본다. 여든아홉 살 샘님이 무릎에 손을 짚고 한 걸음 두 걸음 힘겹게 오른다. 일흔다섯 살 샘님은 구두를 신었다. 돌 자국이 찍히면 굽이 흉할 텐데 발가락도 눌릴 텐데 걱정스럽다.

 

꼭대기에 세운 네모난 쉼터가 크다. 나무결이 꽤 묵었다. 마루에서 내려와 비스듬한 잔디에 선다. 나는 두 팔을 머리 위로 올렸다. 손으로 바람을 모아 들이쉰다. 팔을 뻗은 채 하늘을 보며 햇빛을 먹는다.

 

바닷가 모래밭이 크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밑에서 올려다보면 조그마한 정자인데, 이곳에서 큰 바다 넓은 모래밭을 내려다보는 우리한테 하늘은 바다는 숲은 무얼 말하려나. 바다는 말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내가 날지 못하는 이 마음이 만나는 자리에 뭔가 꽉 끼이고 생각도 나오려고 꿈틀거릴 테지.

 

다시 바다를 끼고 돈다. 하얗게 밀려오는 물결 높이가 남쪽 바다와 다르다. 마을 앞마당에 갯벌이 있어 꼬막을 캐는 남쪽과 달리 오징어배가 통통 다니는 동쪽 바다는 위에서 내려보고 달리면서 바라보는 바다같다. 물방울이 이 드넓은 바다로 모이다니. 어디든 떠돌다가 닿는 커다란 바다에 출렁이는 물결에 마음이 번뜩인다. 풀밭으로 내려가 수선화 앞에 눕는 분들이 있다. 이분들이 보여주는 그림이 얄궂다. 나는 누구하고 말하고 걷는가. 나하고 걷는다.

 

창포말 등대로 올라왔다. 선비처럼 점잖은 샘님이 “일찍 올라오네요.” 말을 건넨다. 말이 적고 짧다. 어린 날 영덕에 살았던 샘님은 “요즘 바다에 좀 옵니까?” 묻는다.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은 즐거워서 웃고 찍고 노는데 난 그러지 않아서 하는 말일까. 멀미약 기운으로 마음이 물결치지 않는 멍한 모습이라, 내가 어떤 마음인지 읽어내지 못했겠지. 차를 타고 돌아가는 길에서는 선비 같은 샘님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는다. 멀미약은 술맛도 누른다. 짝이 읊는 잔소리도 꾹 누른다.

 

“나갔다 왔으면 집에 왔다고 말도 못하나?”

“기다렸나?”

“기다리기는. 남몰래 간 것도 아닌데 집나간 개도 돌아오면 짖는데 왔다는 말도 못 하나. 빨래방에도 불 켜놓고 가스 불도 켜놓고 아들 방도 켜놓고 정신 어디다 두고 다니노?”

“내가 그랬나?”

 

멀미약을 먹으나 안 먹으나 머리는 느림보이다. ‘잘 다녀왔습니다.’ 한꺼번에 몰린 나들이로 말을 꺼내지 못한 마음을 들켰나. 이제 하나 남은 나들이는 꼭 알려야겠다.

 

2023. 04. 12. 숲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