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은삶 40] 들꽃
아침에 일어나니 들꽃이 무척 보고 싶었다. 달 끝물이라 짬이 될까, 서둔다. 여러 군데 돈을 보내고 손질도 빨리 끝냈다. 배가 살짝 고픈데 밥을 먹다 보면 마음이 바뀔 듯했다. 마침 곁님이 삶은 옥수수를 둘 준다. 커피하고 주스를 샀다.
며칠 앞서 걸이를 샀다. 물을 꽂으면 커피를 둘 곳이 없었다. 밑칸에는 물을 넣었다. 위에 종이와 붓을 담은 컵을 내리고 그 자리에 커피를 놓고 옆칸에 주스를 두고 전화기도 꽂는다. 라디오를 듣다가 성경을 듣는다. 걸이가 막혀 소리가 울리고 세다. 뒷칸에 옮기니 듣기가 가볍다. 곁님이 준 옥수수를 먹으면서 달린다.
몇 차례나 들머리를 지나가던 곳인데 한 바퀴 돌고 빠져나가는 길에서 엉뚱한 길로 나왔다. 내 생각에 바로가야 하는데 파동 쪽으로 알린다. 잘못 들어선 줄 뒤늦게 알지만 어쩌지 못하고 그대로 간다. 마을 끝에서 길이 만난다. 그래도 신바람이 난다. 돌아가는 일이 내겐 안 낯설다. 혼자 가니 수다 떨 일도 없으니 저 멀리 마을도 잘 보인다. 우륵마을에 가 보지 않아도 누가 나무라는 사람도 없어 홀가분하게 달린다.
해를 안고 달린다. 햇살이 따갑다. 차 문짝에 둔 토시를 꺼내 낀다. 거치대에 둔 커피를 빨대 꽂아 마시고 놓으니 새롭다. 거치대가 있어 옆자리에 가방을 놓고 꺼내자면 부딪치지만 혼자 다닐 적에는 걸이가 아주 좋다. 달리다 생각나면 붓도 쉽게 집어들고 적을 수 있고, 커피를 고개 젖히고 마시다가 덜컹하면 흘리기도 하는데, 빨대를 꽂아 한 모금 마시고 놓고 쏟을 걱정이 없고 소꿉놀이하는 듯하다.
사십 분 달려 청도 읍성에 닿았다. 읍성 담에 담쟁이가 뻗어 푸릇푸릇하다. 연꽃이 철을 지나 잎이 마르고 떠나간 꽃자리가 썰렁하다. 담벼락 풀밭을 조금 밟다가 카페 뒷마당으로 들어간다. 돌담 너머에 감이 주렁주렁 달리고 보랏빛 맥문동하고 코스모스가 활짝 반긴다. 오솔길에 코스모스가 서로 마주보며 길을 막아 틈을 지난다. 바닥에는 보랏빛 꽃이 길을 넘고 노란 국화도 피었다. 작은 장미꽃도 피고 낮달맞이꽃도 피었다. 보랗빛 하얀빛 좀작살나무 열매가 푸짐하다. 빨갛고 보랏빛 꽃이 다발로 뭉쳐 피어 다른 나라에 온 듯하다.
앉는 자리에 뻗은 꽃이 앉았고, 금목서 꽃내음이 뜰에 가득하다. 바닷가에서 봄직한 채송화도 바닥을 메운다. 이렇게 많이 핀 뜰이로구나. 봄에도 이곳에 와 봤다. 그때도 이제도 꽃을 보니 가슴에서 절로 소리가 나온다. 어쩌면 다른 꽃이 들꽃처럼 피었을까. 꽃누리에 온 듯 하늘누리에 온 듯하다. 꽃을 보니 하루 시름이 절로 풀어지는구나. 꽃을 보니 기쁘네. 뜰 가득 꽃을 헤치고 몇 바퀴를 돈다.
해가 한창 뜨겁게 내리쬔다. 사람인 나도 숨이 턱턱 막히고 살갗이 타들어 가는 듯한 따가운 볕인데, 이 여리디여린 꽃잎이 견딘다. 햇볕을 먹어서 꽃잎을 활짝 열고 방긋 웃는다. 꽃은 웃고 오히려 그림자가 지쳐 길게 길바닥에 누웠다. 시집을 놓고 사진을 찍어도 시집에 눕는다. 시집 겉에 담긴 꽃을 만나는 듯하다. 토끼풀꽃처럼 생긴 보랏빛 꽃이 이 뜰에서 가장 신바람 난 듯하다. 꽃이 걸상을 차지하고 나는 뒤에 서서 바라본다.
조금 가깝다 싶으니 말이 막 나오는 어제 내 모습을 보고 내가 나한테 무척 섭섭했다. 생김도 크기도 내음도 다 다른 이 많은 꽃이 고요히 피고 따갑고 뜨거운 볕에도 웃기만 하는 꽃을 보면서 어제 나를 돌아본다. 자주 꽃을 봐야겠다. 문득 튀어나오는 말씨에 그동안 마음을 다스린 일이 헛일이 되어버린다. 꽃이 보고 싶어서 가깝고도 멀리 달려오고, 꽃을 보고 좋아서 뜰을 돌고 돌고 얼굴이 익는다. 꽃이 어제 내 창피를 달래나 주는 듯 제 빛깔에 담은 내음을 내 얼굴에 뿜는 듯하다. 사람이 가꾼 꽃이지만 들꽃 같은 이 동산이 아주 좋다. 거친 마음을 꽃처럼 결을 다듬는다. 마음을 들뜨고 가볍게 하는 꽃이 한목소리로 나를 불러 다독여 주는 듯하다. 꽃은 이렇게 많이 피어 제 사랑을 내게 나누고 바람에 실어 보내는구나.
2022. 09. 30. 숲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