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숲하루 풀꽃나무 이야기 39] 깨꽃
장골에 사는 숙이네를 지나 등성이 따라 올라가면 감나무가 있는 깨밭이 있었다. 깨가 한창 자라 꽃을 피우고 마디마다 깨집이 열릴 적에 손가락 굵기인 푸른 깨벌레가 꼬물꼬물 참깨잎을 갉아먹었다. 열두세 살 적에 동무들과 깨밭에 모였다. 두 손 모으고 눈을 감고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기도했다. 교회에 나가니 밥을 먹을 적에도 어디에 가면 기도 먼저 하라고 배웠다. 어머니 몰래 교회를 나갔다. 어머니는 교회 다니는 사람을 예수쟁이라 부르며 싫어했다. 나는 교회에 나가고 싶은데 어머니는 말린다. 집에서는 기도하지 않고 동무하고 놀 적에만 기도했다. 밭에서 모여 기도하는데 서로 입맞춤이라도 한 듯이 “하느님 고맙습니다.” 같은 말만 했다.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기도를 마치고 갖고 온 공책을 펼쳤다. 나는 동무들 앞에서 새 공책 첫 쪽에 빽빽하게 적은 글을 읽었다. 기도할 적처럼 돌아가면서 읽었다.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었는지 모르지만 내가 쓴 글은 소설인지 모른다. 나는 다른 아이들보다 길게 썼다. 학교에서 나온 책 말고는 책 한 자락 읽지 않은 어린 날이다. 책은 우리한테 너무 멀리 있었다. 얼마나 책을 읽고 싶었으면 글을 지어 동무들 앞에서 들려주었을까. 말도 안 되는 글이어도 깨벌레가 들어 주고 감꽃이 들어 주었다. 나는 깨가 쏟아지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는지 모른다. 깨꽃처럼 수수하게 피는 꿈을 꾼다.
2021. 07. 13. 숲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