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달겨레소리 한실 글님 ]
우리말을 잡아 쓸 수 있는 글자가 없던 때에 우리말을 잡아 써 놓으려고 이웃나라 한자를 들여다 때로는 뜻으로 때로는 소리로 적으면서 옛 한아비들이 애쓴 걸 보면 참으로 눈물겹다.
그렇게 애쓴 보람도 없이 우리 땅이름, 내 이름, 메 이름, 고을 이름, 나라 이름까지 어느 것 하나 우리 겨레가 부르던 소리로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우리 겨레한테 한자가 맨 처음 들어온 것이 372해이니, 벌써 즈믄(천)해 하고도 일곱온(700)해가 가까워온다.
그 새 이렇게 글로 써놓은 것은 거의 다 한자로 적다보니 한자 글 속에는 우리 옛 한아비들이 부르던 우리말 소리는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다. 땅이름도 한자이름으로 여러 차례 바뀌어 왔다.
메와 골, 가람과 내, 마을과 고을, 들과 벌, 어느 것 하나 우리말 이름이 한자로는 살아남을 수가 없다. 우리말 마을 이름, 들 이름, 고을 이름을 빼면 우리글로 적었더라도 한자말을 우리 소리로 읽어 적은 것이니, 우리말은 아니다.
그나마 우리말 이름이 남아 있다면 사람들 머릿속과 말속에 남아 있을 뿐이다.
우리 겨레한테 배달글은 참으로 하늘이 도운 것임에 틀림없다.
우리말을 거의 소리대로 적을 수 있는 글이어서 더욱 빼어나다. 우리말을 오롯이 우리글로 다 적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말은 소리 잡는 연장(녹음기)으로 잡아 놓으면 뒷사람이 바른 소리를 배울 수 있다.
막동이 임금님과 함께 우리글을 만드신 분들께는 언제나 우러러 더없는 고마움을 느낄 따름이다. 그러고 보면 유학에 파묻혀 배운 이들이 우리글을 멀리했던 조선 닷온 해 내내, 또 종살이 동안에는 우리 말글을 송두리째 잃을 뻔 하다가, 종살이 벗어난 지 일흔다섯 해가 지나도록 제대로 우리말을 꽃 피우지 못한 것은 참으로 안타깝다.
그러나 이제 참 때가 왔다.
우리말, 우리글을 마음껏 꽃 피울 때가 온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종요로운 일인지, 이 2021(두 즈믄 스물한)해가 다음 열 해를 여는 첫 해이고 그 뒤 스무 해, 서른 해를 내다볼 때 더욱 그러하다.
오늘날 우리말을 잡아먹으며 자리 잡는 잉글말을 눈여겨본다.
‘정확한 워딩이 뭐였어요?’ 란 말을 말쟁이(아나운서)나 글쟁이(기자)들이 많이 쓴다.
'말한 대로 그대로 말해보면 뭐였어요?' 이다.
사람들이 남 말을 보태거나 빼거나 꺾거나 휘어 말하면서 구부러뜨리니까 이런 말이 나옴직 하다. ‘쉴드친다’라고도 한다. 말쟁이(스피커)들이 다른 이를 갈음하여(대신하여) 막아준다는 뜻으로 쉴드친다고 말한다.
이렇게 오늘날 잉글말이 우리말을 한마디 한마디 잡아먹으며 자리 잡듯이, 쫑궈한자가 즈믄 엿 온(1600) 해 동안 우리말을 하나하나 잡아먹으면서 자리 잡았고, 니혼 한자말(한글왜말)이 또한 지난 온해 사이에 우리말을 잡아먹으며 자리 잡았다.
한자말 가운데는 우리말에 없던 말이라 우리말을 살찌우는 말도 조금은 있지만, 거의 모두는 조금만 마음 가다듬어 살펴보면 다 우리말로 바꿔 쓸 수 있다.
우리말이 죽어가는 가장 큰 까닭은 우리 겨레가 한자말 잉글말에 젖어 배달말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눈길(관점)탓이다.
배운 이는 배운 이 대로, 못 배운 이는 못 배운 이 대로 우리말을 업신여긴다.
배우지 않아도 저절로 알겠거니 여기거나 낮은 말로 보고 못 배운 사람이나 쓰는 말로 여긴다.
그래서 우리말을 부지런히, 뼈를 깎아가며 힘써 배우고 익혀 잘 부려 쓰려고는 하지 않는다.
그럴 짬이 나면 한자를 한 자라도 익히거나, 잉글말 낱말(단어)이라도 한 마디 더 배워 익히려고 한다. 제법 깨였다고 여기는 사람도 배달말을 배워 익혀 잘 쓰겠다는 생각을 못 한다.
온 나라, 온 겨레가 한자말, 잉글말을 떠받드는 마음에서 못 벗어난다.
말 가운데 가장 빼어난 우리말을 스스로 업신여기면서 왜말과 한자말과 잉글말(영어)에 물들어 있다. 이제라도 우리를 늘 주눅 들게 하던 한자말들, 잉글말들을 잠깐 젖혀두고 새롭게 배달말을 배워 익혀 써 본다면 가늠할 수 없는 기쁨을 맛보지 않을까 싶다.
그래도 제 둘레에 있는 이들은 저한테서 한두 차례 우리말 얘기를 들었을 텐데도 우리말 살려 쓰는 일이 우리 겨레가 펼쳐 갈 앞 삶에서 얼마나 종요로운지를 아직 눈치 채지 못하는 것 같다.
저는 이 모든 한자말이 일하면서 즐겁게 배달말살이하며 살아가던 우리겨레를 오래도록, 즈믄 해 넘게 주눅 들게 한 으뜸가는 쓰레기(적폐)라 여긴다.
우리 겨레한테 한자는 오래도록 일 안 하고도 먹고 살 수 있었던 배운 사람들이나 쓰던 글말이었다. 어떤 이들은 한자말 속에 빼어난 우리 겨레 삶꽃이 담겨 있다는데 저는 그렇게 안 본다.
예부터 한자를 부려 쓰려면 할아버지 때부터 일 안 하고도 먹고 살 수 있어, 그 아슨아들(손자) 때가 되어야 제대로 한자를 부려 쓸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 한자를 깨친 사람들이 몇이나 되었으며 그런 사람들한테서 무슨 좋은 생각(사상)이 나올 수 있었을까? 또 한자 속에 아무리 좋은 게 담겨 있더라도 그것이 쉬운 우리말로 다시 써서 여럿이 쉽게 알 수 있을 때 뜻이 있고 빛이 난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배워 익힌 한자말이 다 왜말인데 ‘왜말이면 어떠랴?
뜻이 서로 잘 사무치면 되지.’ 그렇다. 그러나 잘 살펴보면 왜 사람들이 만든 이 한자말을 온해 가까이 우리 겨레가 써 봤지만 우리 겨레 마음과 생각과 뜻과 꿈을 쉽게 잘 드러내는 말이 못됨이 드러나지 않았나? 아니다. 우리말이 오히려 더 어렵다. 그것도 맞는 말이다. 왜냐하면 왜말은 학교에서 첫배곳 6해 갑높배곳(중고) 6해 적어도 12해는 배웠지만 우리말은 한 해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그러니 얼른 보면 오히려 왜말이 쉬운 것 같다. 그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동안과 힘을 쏟아부었던가를 되돌아보면 환히 알 수 있다.
그 한자투성이 왜말 배우던 힘 가웃에 가웃에 가웃(반에 반에 반)만 써서 배달말을 배운다면 배달말 바치(전문가)가 되고, 배달말글살이를 훌륭하게 해내어 뒷사람들에게 겨레말글을 물려줄 수 있을 거다.
또 오늘날 아이부터 어른까지 누구 할 것 없이 잉글말 배우느라 젖 먹던 힘까지 다 내는데 그 힘 열에 하나만 제 나랏말 배우고 익히는데 쓴다면 누구나 우리말 큰 글님(대문장가)이 될 거다.
불을 보듯 환하지만 참(실상)을 보지 않으려고 눈 돌리면 안 보이고 또 한자말, 잉글말에 젖어 있는 동안에는 누구라도 제대로 볼 수가 없다.
이제라도 우리 겨레 한 사람 한 사람이 우리말을 살려 쓸 때 우리말이 살아나고 우리 겨레 얼이 되살아나고, 우리 겨레가 다시 들썩들썩 신명나게 살아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