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내가 사랑하는 아이] 4. 배꼽
서랍을 뒤지다가 주머니 하나 집어든다. 안이 훤히 보이는 봉지에 배꼽이 들었다. 하늘빛 집게에 꽉 물렸다. 내 몸에서 떨어진 끄트머리 쪽은 마른오징어처럼 누렇고 작다. 아기 몸에서 떨어진 배꼽줄은 까만빛이 감돌고 반질반질한 돌빛이 돌고 더 크다. 아무것도 없는 배꼽줄은 푸르스름하다. 아들이 태어나고 열 해 동안 내가 지니다가 따로 방이 생기고 책상을 들인 열 살 때 넣어 건네준 배꼽이다.
아들이 우리에게 찾아오기 앞서는 두 딸만 바라보고 키우려고 했다. 곁님도 나도 둘레에 아들 있는 벗이 부러웠지만, 배를 두 번이나 갈랐으니 꿈도 꾸지 않았다. 해를 거듭할수록 마음이 슬슬 바뀌었다. 일터에 잦게 찾아오는 쉰 살쯤에 이른 아줌마가 다가와서 말했다. “거기 앉아서 돈 몇 푼 버는 일보다 집안을 이어주는 일이 먼저다.” 아흔쯤 보이는 할아버지도 늘 같은 말을 했다. 하얀 수염에 삿갓을 쓰고 모시옷을 입었다. 지팡이를 바르르 떨면서 몸을 곧추세우고 다가왔다. “새벽 3시에 아들 만들고 오른쪽으로 내려오라”느니, “술을 한 잔 마시고 하라”느니, 바로보기 부끄러울 만큼 아들 낳는 낯뜨거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시할머니도 손부야 부르며 아들 하나는 낳아야지 하고 내 마음을 돌렸다.
한 해 동안 아이 가지려고 애썼다. 달마다 아기 잘 생기는 날을 하루 잡아 애썼지만 생기지 않았다. 해가 바뀐 새해 첫날이었다. 여느 때는 뻣뻣하게 지내다가도 첫날에는 사랑을 나눈다. 한 해 한마음으로 잘 지내자는 뜻을 첫날에 담는다. 2000년도 첫날에도 그랬다. 며칠 뒤 쉬는 날에 시골에 새해 절을 하러 갔다. 시어머니가 살며시 말을 꺼냈다.
“서울 아무 병원에 가서 미혼모가 낳은 아기를 바로 사 오자.”
여덟 해 동안 내게 아들 이야기를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처음이자 마지막인 이 한 마디에 가슴이 철렁하고 벼랑 끝으로 내몰리는 듯했다. 속내는 입양하는 좋은 일도 하고, 키워서 집안일을 돕고 나이 들면 가까이서 도움도 받을 아이로 삼고 싶었다. 이녁 아들도 둘씩이나 있고 며느리인 내가 아이를 못 낳지도 않았는데, 그럴 수는 없다. 머리 검은 사람을 거두면 말썽이 생길 수 있다고 타이르듯 말렸다.
이미 두 번이나 배를 갈랐기에 내게서 손주 볼 마음을 접은 뜻으로 들려왔다. 내 삶길에 아들이 있을까 궁금했다. 점을 보면 좋거나 나빠도 속을 태우기에 나는 아예 안 보다가 앞집 언니 손에 이끌려 처음으로 점집에 갔다. 집 가까이 있는 병원 뒷골목 언덕집이다. 어두침침한 방에 들어가 앉았다. 점쟁이는 작은 상에다 쌀을 뿌리며 쌀알을 헤아리듯 만지더니 “시집 못간 옛어른이 가로막아서 배가 차다, 정성을 빌어라.”했다. 나는 정성이 뭐냐고 물었다. 굿하라는 혹만 달고 나왔다. 덜컹 무서웠다. 시어머니를 찾아가 이런저런 말을 했다. 이튿날에 어머님이 그 점집을 찾아가 뒤끝 없게 잘 마무리했으니 들은 말 다 잊으라 했다.
내가 보기에는 점쟁이는 엉터리였다. 새해 첫날에 아이가 내게 이미 있었다. 시계처럼 딱딱 맞던 달거리가 건너뛰었다. 일 마치고 산부인과에 늦게 가서 아슬아슬하게 진찰을 받았다. 간호사가 먼저 나가고 의사도 나가려 할 때 곁님이 문득 아이들 이야기를 했다. 의사도 우리처럼 딸만 둘이 있어 제 씨앗을 얼려 두었단다. 딸이 있어 우리 마음을 잘 헤아려주었다. 이때다 싶어 곁님은 잽싸게 어머니 이야기를 꺼냈다. 망설인 끝에 기꺼이 도와주겠다는 말을 들었다.
그때는 성별을 살피면 형벌을 받던 때이다. 아홉이레(9주)를 채운 날 쉬기로 했다. 비행기 타고 서울 가서 의사가 적어준 병원을 찾아갔다. 종이에 이름을 적고 융모막 검사를 했다. 탕· 탕 뭔가로 몇 번 몸을 치더니 아기 집 살결을 뗐다. 아랫배가 가볍게 아팠다. 화장실에서 이곳으로 보내준 의사와 살짝이 전화했다. 시키는 대로 백이십만 원을 현금으로 셈했다. 차츰 아기가 떨어질 듯이 아파서 걷기 힘들었다. 공항 가까이 살던 오빠 집에서 한잠을 자고 마지막 비행기를 탔다. 이튿날 아침에 일어나니 걱정대로 핏물이 비췄다. 유산될까, 몸을 살피고 싶어도 하루를 쉰 탓에 눈치를 보며 겨우 일했다.
며칠 뒤 99% 아들이라는 말을 들었다. 바라던 아들을 품었지만 일흔 군데에 동냥하라는 점쟁이 말이 두고두고 찜찜했다. 속는 셈 치고 때와 곳을 가리지 않고 얻어먹었다. 그럭저럭 배가 부를 때까지 알게 모르게 일흔 판을 채웠다. 내가 아무도 몰래 밥을 얻어먹는 동안 시어머니는 시골 윗마을에 있는 절에 나를 데리고 갔다. 아이가 잘 자라도록 스님한테 기도를 맡겼다.
예순이나 일흔 살까지 일하려던 일터를 내려놓았다. 아들하고 맞벌이를 바꾸었다. 두 아이를 키워주신 시어른들은 마지막 아이는 내 손으로 하나 키우길 바랐다. 뜨내기처럼 흩어져 살고 만나던 우리 집안이 처음으로 보금자리에 뿌리를 내렸다. 내가 집에 있으므로 두 딸이 마음 놓고 기뻐했다. 서른둘에 찾아온 셋째 아이에게 노래를 들려주었다. 집에는 모차르트가 흐르고 작은아이가 배우는 소리를 들었다. 예쁜 것 먹고 이쁘게 말하고 병문안도 삼갔다.
시월이 되었다. 낳을 날을 앞당겨 수술 날을 받았다. 그렇지만 수술 일주일 앞서 큰딸이 계단에서 굴러 코뼈가 부러지는 바람에 놀랐는지 배가 아팠다. 하루도 못 기다리고 빨리 나오고 싶었을까. 어느새 하루를 당겼다. 일 나가느라 곁님이 비운 자리에 코를 다친 큰딸하고 작은딸이 내 돌봄이가 되어 아침 11시에 갑자기 수술했다. 우리엄마가 오고 시어머니가 오고 시골에 계신 시할머니하고 시아버지도 아주 기뻐했다.
엄마젖을 눈감고도 잘 찾고 나비잠을 자던 똘똘한 얼굴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배고프면 울고 오줌싸면 울고 똥싸면 울고 안아 주면 그쳤다. 나는 날마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쉰하루동안 아이 울음을 담아 놓았다.
열 달을 잇던 배꼽줄을 끊고 열흘 만에 떨어진 배꼽이다. 살아가는 동안 많이 아플 때 제 배꼽을 달여 먹으면 낫는다는 말 때문에 이제껏 간직했다. 네가 나를 찾아서 왔을까, 내가 애타게 불러서 왔을까. 숨이 막힌 스무 해 숨이 저 배꼽에 갇힌 듯하고 아이 숨이 내게 들어온 보람에 새삼 가슴이 벅차다.
2020.12.19. 토. 숲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