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달겨레소리 한실 글님 ]
이 마음닦기는 고타마 붓다가 가르친 ‘거룩한 길’을 살아감을 말하는데 거룩한 길(담마)은 바른 삶(시일라), 마음모음(사마아디), 슬기(빤냐) 세 갈래로 나뉩니다. 바른 삶은 나날살이에서 말이나 몸으로 어느 누구 마음도 아프게 하거나 다치게 하지 않고 살아감을 말합니다. 다섯 삼감, 여덟 삼감을 잘 지킵니다. 마음 모음(사마아디)은 마음을 한곳에 모은다는 말인데, 그러려면 나들숨 닦기(아나빠나)를 배워야 합니다.
아나빠나가 무엇일까요?
아나빠나는 빠알리말로 들숨날숨, 나들숨을 뜻합니다. 사람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언제나 숨을 들이쉬고 내쉽니다. 몸으로 무얼 하건 앉아 있건 서있건 누워 있건 걸어가건, 또 깨어있든 잠을 자든 언제나 숨은 들어오고 나갑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태까지 이걸 알아차리지는 않았습니다.
이제 코밑에서 이 숨을 알아차립니다. 몸으로 무얼 하든 숨은 언제나 들어오고 나가므로 숨 알아차리기도 언제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열흘 동안은 되도록 방에서 자리에 앉아 알아차립니다.
그러면 어떻게 앉는 게 좋을까요? 이 자세가 좋다, 저렇게 앉아야 한다는 건 없습니다. 앉고 싶은 대로 앉고 팔도 놓고 싶은 대로 놓습니다. 저마다 익숙한 앉음새를 고르되 한 앉음새로 오래 앉을 수 있으면 좋습니다. 되도록 왼 오른 꼴이 같게 앉고 앉을 때 왼 오른 다리를 바꿔주면 앉음새를 바로 잡기 좋습니다. 그러고는 두 눈을 감고 입도 다뭅니다. 눈을 감고 숨을 알아차리므로 안경을 낀 사람은 마음 닦을 때는 늘 안경을 벗습니다. 또 등과 목은 똑바로 곧추 세웁니다. 굽어진 줄 알면 언제라도 바로 세웁니다. 이렇게 등과 목을 똑바로 세우면 오래 앉는 데 도움을 줍니다.
그러고 나서 온 마음을 코밑에 두고 그곳에서 들숨을 알아차리고 날숨을 알아차립니다. 알아차린다는 말은 생각하는 것과 다릅니다. 숨이 들어오고 있다고 또는 나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방안에 앉아 눈을 감고 있어도 바깥에서 나는 소리가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있듯이 눈을 감고 코밑을 지나 들어오고 나가는 숨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을, 아니 이것만 합니다. 마음이 하는 일 가운데 알아차리기가 있는데 잘 길러지지 않은 이 알아차리기를 꾸준히 길러 굳건히 자리 잡게 합니다.
언제나 들어오고 나가는 숨을 그 때마다 코밑에서 알아차리는데, 숨을 고르려고 하지 말고 쉬어지는 대로, 있는 그대로 알아차립니다. 숨이 길면 긴대로, 짧으면 짧은 대로, 깊으면 깊은 대로, 얕으면 얕은 대로, 거칠면 거친 대로, 고우면 고운 대로, 쉬어지는 대로 알아차립니다. 숨이 짧다고 길게 하려 한다든가 거칠다고 곱게 하려 하지 않습니다.
처음 숨을 알아차리는 이가 숨이 나가는지 들어오는지 뚜렷하지 않아 잘 알아차리지 못할 때는 숨을 몇 차례 일부러 조금 세게 쉬어 알아차립니다. 그러나 이럴 때도 그저 몇 차례만, 그것도 옆 사람이 눈치 챌 만큼 세게는 쉬지 말고, 혼자 알 수 있을 만큼 조금 세게 몇 차례 쉬고는 숨을 내버려 두어 저절로 쉬어지는 숨을 알아차립니다.
숨을 배에서 알아차리든가 아니면 배꼽아래(흔히 단전이라 함)에서 알아차리든가 가슴께에서 알아차릴 수도 있습니다. 코밑에서 숨을 알아차릴 때 기운이 목이나 어깨 또는 머리쪽으로 치솟아 올라 마음을 코밑에 모으기가 쉽지 않은 사람은 가슴이나 배에서 숨을 지켜볼 수 있습니다.
숨이 나며 들며 닿는 코밑 손가락 끝만 한 작은 곳에서 들숨을 알아차리고, 날숨을 알아차립니다. 쉬어지는 대로 알아차리고, 숨마다 알아차립니다. 알아차리지 않고는 한숨도 들어오게 하지 않고, 알아차리지 않고는 한숨도 나가게 하지 않습니다.
숨을 알아차릴 때 문 앞을 지키는 문지기처럼 합니다. 문지기는 문 앞에서 들어오는 사람 나가는 사람을 지켜보기만 합니다. 들어오는 사람 따라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나가는 사람 따라 밖으로 나가지 않습니다. 이처럼 숨이 나며 들며 닿는 코밑 손끝만큼 작은 곳에 마음을 붙박아두고 그곳에서 들어오는 숨을 알아차리고, 나가는 숨을 알아차립니다. 마음이 숨 따라 몸 안으로 들어가거나 숨 따라 몸 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합니다. 오직 코밑 그 곳을 지나는 들숨을 알아차리고 날숨을 알아차립니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숨을 알아차리다 보면 마음이 숨만을 알아차리지 않고 미끄러져 나가 여기 저기 떠돌 수 있는데, 이때는 숨 놓친 걸 얼른 눈치채고 다시 숨을 알아차립니다. 마음이 또 헤매면 다시 숨으로 돌아옵니다. 이렇듯 마음이 숨 알아차림을 놓치면 얼른 숨을 다시 알아차리고, 다시 숨을 알아차립니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오직 숨만 알아차리는데, 가장 좋기는 숨마다 알아차리는 일입니다. 그러나 묵은 마음버릇 때문에 숨 알아차림을 자꾸 놓치는데, 이때 조금도 속상하거나, 짜증나거나, 주눅 들거나 숨 놓친 걸 탓하지 않습니다. 숨 알아차림 하나도 제대로 못하나 싶어 스스로 풀죽지 않습니다. 아무리 자주 놓치더라도 웃으며 다시 숨을 알아차립니다.
마음이 여기저기 떠돌아 집에도 가고, 벗에게도 가고, 엄마나 아이한테도 가고, 아까 있었던 일에도 가고, 묵은 옛 생각에도 가고 어디 안가는 데가 없습니다. 또 왜 이렇게 온갖 생각이 다 떠오르나, 이 생각을 좀 줄일 수는 없을까, 아니면 마음이 못 달아나게 하는 길은 없을까하고 이런저런 생각들이 밀려옵니다. 이 모든 생각을 젖혀두고 그냥 숨으로 돌아옵니다. 그저 마음이 헤매면 헤맨 줄 알고 숨으로 돌아오고 생각 속에 오래 빠져 있었으면 빠진 줄 알고 그냥 숨으로 돌아옵니다. 이렇게 헤매고 떠돎이 바로 내 마음버릇입니다. 이 떠도는 마음을 한곳에 붙들어 매어 고요하게 가라앉히는 일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 어찌 보면 쉬운 것 같지만 쉬운 일만은 아닙니다. 꾸준히 끈질기게 쉬지 말고 닦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아무리 헤매더라도, 어디를 떠돌든 다시 알아차리고 숨으로 돌아와 숨 알아차림을 이어갑니다. 이어 알아차림이 종요롭습니다. 이 나들숨닦기를 굳건히 하는 데는 이어 알아차림이 가장 좋은 길이고 열쇠입니다.
마음이 아주 날카로워져서 무척 가녀린 숨조차도 뚜렷이 알아차릴 수 있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그리고 이 알아차림이 오래 이어지게 합니다. 이 말은 어떤 생각 헤살도 받지 않고 알아차림이 끊이지 않고 한 번에 오래 알아차린다는 뜻입니다.
숨을 이어 알아차리면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습니다. 마음이 가라앉으면 숨은 고와지고, 여려지고, 가늘어지고, 짧아집니다. 숨이 고와지고 여려지고 짧아지면 마음은 좀 더 가라앉고, 마음이 좀 더 가라앉으면 숨은 더 고와지고 여려지고 짧아집니다. 저절로 이렇게 되어갑니다. 숨을 곱게 쉬려 한다거나 마음을 가라앉히려 하지 않습니다. 저절로 일어나도록 놓아둡니다. 누리흐름이, 참(담마)이 일하도록 내버려 둡니다. 마음닦이가 할 일은 오직 코밑에서 들숨을 알아차리고 날숨을 알아차리는 것뿐입니다. 있는 그대로 쉬어지는 대로 한숨도 놓치지 않고 이어 알아차리고 이어 알아차리기만 합니다.
우리는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립니다. 그것도 쉬어지는 대로, 거칠든 여리든, 곱든 세든, 길든 짧든, 깊든 얕든, 쉬어지는 숨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기만 합니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저절로 쉬어지는 숨을 못 알아차릴 때나, 마음이 생각 속에 오래 빠져 있을 때는 몇 차례 조금 세게 일부러 숨을 쉽니다. 졸릴 때는 숨을 멈춰 참을 수 있는 데까지 참았다 숨을 쉽니다. 이렇게 하면 온 마음이 숨에 모아져 졸음에서 벗어나 오롯이 숨 알아차림에 마음을 모을 수 있습니다. 이럴 때 말고는 언제나 쉬어지는 숨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립니다.
부지런히 나들숨을 알아차리면 숨 알아차림이 얼마만큼 이어지는데, 이때는 숨 닿음을 알아차립니다. 열흘 닦기에서 둘째 날 합니다. 숨은 나며 들며 코밑 작은 곳에 닿는데 이 닿음, 숨 부딪침을 알아차립니다. 숨이라는 몬(물질)과 코밑 몸이라는 몬이 닿음을 마음이 알아차립니다. 닿음이 뚜렷하지 않을 때는 몇 차례 조금 세게 쉬어 숨 닿음과 숨 닿는 곳을 알아놓고, 저절로 쉬어지는 숨도 같은 곳에 닿음을 알아 가녀린 숨조차도 나며 들며 닿음을 알아차립니다. 이 닿음, 부딪침을 알아차리면 마음이 조금 더 날카로워집니다. 마음이 조금 날카로워지고 가라앉게 되면 헤매는 마음을 찬찬이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온갖 군데를 다 헤매는 마음도, 가만히 살펴보면 두 군데를 헤맴을 알 수 있는데, 하나는 지난 일이고 다른 하나는 아직 오지 않은 앞일입니다. 지나간 일을 이런 저런 옛날 생각으로 떠올리고, 앞일을 이럴까 저럴까 헤아려 봅니다. 사람은 이제 여기 눈 깜짝할 사이에 들숨을 알아차리고 날숨을 알아차릴 수 있을 뿐이나, 마음은 이제 여기 코밑 숨 흐름에 있지 않고 이미 가버린 옛일을 떠올리거나, 아직 오지 않은 앞일을 꾸미느라 언제나 바쁩니다. 이것이 바로 묵은 마음버릇이고, 이 마음버릇으로는 참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이제 여기서만 살 수 있습니다.
숨 알아차림은 바로 이제 여기를 살 수 있는 바르게 사는 길, 곧 “참삶 길”입니다.
• 왜 나들숨 알아차리기로 마음을 한곳에 모으는가?
숨은 몸ㆍ마음 틀 안에서 일어나는 두루 미치는 참 가운데 하나입니다. 숨은 누구라도 다 쉽니다. 그 숨을 아이 숨 어른 숨 겨집 숨 사내 숨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또 가난뱅이 숨 가면이 숨 배운 이 숨 못 배운 이 숨이라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숨은 숨일 따름입니다. 누구나 쉬는 숨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일은 두루 미치는 참입니다.
우리 모든 괴로움 뿌리는 겉마음에 있지 않고 저 깊은 마음속에 쌓여 있는 묵은 마음더럼들에 있습니다. 이 묵은 마음더럼들은 언제나 몸 느낌에 닿아 있고 몸 느낌이 좋으면 바라서 달라붙고 몸 느낌이 언짢으면 싫어하고 미워하며 밀어냅니다. 이 마음버릇이 바뀌지 않고는 내내 괴로움 속에 뒹굴 수밖에 없습니다. 괴로움이라는 앓이 또한 두루 미치는 참입니다. 바라고 골내고 짜증내고 싫어하고 미워하고 어르고픈 마음더럼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습니다. 골나는 건 골나는 거고 두루 미치는 참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제 마음 더럼을 뿌리 뽑으려면 두루 미치는 마음닦기를 배워 익혀 스스로 마음 닦아야 합니다. 이 마음닦기가 붓다가 알아내고, 가르쳐 물려 내려온 건 맞지만, 마음닦기는 믿음(종교)이 아닙니다. 마음몬갈(마음물질과학)일 뿐 종교와는 아주 다르고 조금도 이어진 데가 없습니다.
누구라도 이 마음닦기로 마음을 닦으면 마음이 깨끗해집니다. 왜냐하면 마음 닦는 거리(대상)가 저마다 제 몸ㆍ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참’이고, 이 ‘참’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 마음이 저절로 깨끗해지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나 천주교 믿는 사람이든, 불교 믿는 사람이든 회교 믿는 사람이든 누구나 저절로 쉬어지는 제 숨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 마음이 한 곳에 모아지고 마음은 차츰 가라앉아 고요합니다.
또 숨은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은 언제나 들어오고 나가고 들어오고 나가므로 몸으로 무얼 하든, 늘 숨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깊은 잠에 빠졌을 때 말고는 언제나 숨을 알아차릴 수 있어 마음을 한곳에 모으는 데 이보다 더 좋은 거리가 없습니다. 어린 아이도 배워 닦을 수 있고, 아주 늙은 사람, 앓아누워 지내는 사람도 이 마음닦기를 배워 익혀 닦아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