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우리말 19 허탕 뭔가 빠진 듯한 하루하루가 흐른다. 비가 오는 날 자동차를 씻었다고 하면 뒷불을 갈아 주기로 한 곳이 있는데, 어쩐지 헛걸음만 했다. 하루도 아닌 이틀째 헛길이다. 손수 뒷불을 갈지 못 하니 어쩌지 못 한다. 잔뜩 불을 내 본들 나 혼자 괴롭다. 좀 걸어 보자고 생각하면서 냇길을 따라서 천천히 마을책집으로 간다. 처음 닿은 곳은 안 열었다. 그러네 하고 두리번하다가 다른 책집으로 간다. 아기를 돌보는 젊은 책집지기가 일하는 곳은 열었다. 반갑게 절을 하면서 들어간다. 책도 책일 테지만, 숨을 돌리고 마음을 고른다. 얼마 앞서 미끄러진 일을 떠올린다. 어디에 글을 좀 냈는데 떨어졌다. 지난해에도 헛물을 켰고, 올해에도 헛바람만 마신다. 새해에 다시 내 볼까? 이듬해에도 또 떨어지면? 헛발에 헛일에 허탕만 자꾸 치면? 그러면 다다음해에 새로 내도 되겠지. 네 해 다섯 해 씩씩하게 걸어가 보자. 2024.03.13. 숲하루
[ 배달겨레소리 숲노래 글님 ] 숲노래 책숲마실 . 마을책집 이야기 늦봄 바라봄 ― 수원 〈책 먹는 돼지〉 인천 배다리에서 마실하고서 우리말 이야기꽃을 폈습니다. 수봉산 기스락에서 하룻밤을 묵었고, 아침에 보낼 글을 매듭짓고서 수원으로 전철을 타고 넘어갑니다. 여름을 앞둔 늦봄 끝자락은 뜨끈뜨끈합니다. 어제 들려준 여러 낱말을 되새깁니다. ‘굴’을 캐는 바닷가 시골에서는 ‘굴’이라 말하지 않고, 으레 ‘꿀’이라고 말합니다. 곰곰이 보면, ‘굴’이란 스스로 멈추면 ‘구덩이’요, 스스로 흐르면 ‘구름’이요, 스스로 씨앗으로 삼아서 품으면 바다구슬(진주)을 낳는 ‘꿀’로 갈 테니, ‘굴’이란 ‘꿈’을 품은 바닷빛이지 싶어요. 바다라는 곳은 ‘바탕’을 이루는 ‘바닥’이기에, 모든 꿈도 바로 이곳 바다에서 태어나니, ‘굴’이란 스스로 밤빛(어둠)으로 잠들면서 포근히 쉬면서 새로 깨어날 첫길이라고도 여길 만할 테고요. 이제 세류동 〈책 먹는 돼지〉에 닿습니다. 오늘은 이곳에서 그림책 《응시》를 기리면서 김휘훈 님이 책수다를 폅니다. 좀 늦게 닿았기에 책집 앞에서 해바라기를 하며 기다립니다. 그림책 《응시》는 ‘바라봄’을 말없이 들려줍니다. 바다에서 바
[ 배달겨레소리 숲노래 글님 ] 숲노래 책숲마실 . 마을책집 이야기 이미 벌써 아직 ― 부산 〈학문서점〉 이미 읽은 책을 되읽습니다. 예전에는 그무렵까지 살아온 나날을 바탕으로 읽었고, 오늘 읽는 책은 오늘까지 살아낸 숨결을 바탕으로 익히는 살림입니다. 열 살에 읽은 책을 스무 살에 되읽으면 남다르고, 서른이랑 마흔이랑 쉰에 되읽으면 새롭습니다. 어릴 적에는 어떻게 느꼈는지 돌아보면서 되읽습니다. 지난날 무엇을 놓쳤는지 짚고, 어제부터 오늘에 이르도록 한결같이 바라보는 대목을 곱씹습니다. 속깊은 책이라면 두고두고 되읽습니다. 얕은 책이라면 몇 쪽 넘기지 않아도 벌써 줄거리가 다 보이고 허전합니다. “나라면 이런 줄거리를 이처럼 안 쓸 텐데.” 하고도 생각하고, “나라면 이 줄거리를 어떻게 살릴 수 있나?” 하고 살핍니다. 굳이 모든 사람이 책을 쓸 까닭이 없지만, “내가 책을 쓴다면 글결을 어떻게 북돋울 만한가?” 하고 톺아보면서 더 깊고 넓게 읽어낼 수 있습니다. 아직 안 읽은 책을 장만합니다. 앞서 읽은 책을 되사더라도 오늘 손에 쥐는 책은 ‘새책’입니다. 새책집에서도 새책을 장만하고, 헌책집에서도 새책을 사들입니다. 모름지기 모든 책은
[ 배달겨레소리 숲노래 글님 ] 숲노래 노래꽃 / 숲노래 동시 내가 안 쓰는 말. 가능 빗물은 하늘땅 씻고 풀잎 나뭇잎 다독여 햇빛은 들숲 감싸고 냇물 바닷물 간질여 씨앗은 고요히 꿈꾸고 마을에 푸른숨 일으켜 열매는 알알이 영글고 모두들 넉넉히 살찌워 너는 휘파람 불 줄 알고 나는 바람춤 즐긴다 우리는 천천히 걸을 수 있고 함께 온누리 누빈다 해보면 새롭게 된다 그리면 언제나 이뤄 바라보며 하나씩 하고 놀고 노래하며 노을로 ㅅㄴㄹ 할 수 있는지 없는지 처음부터 알 수 있을까요? 얼핏 할 수 있는 듯싶으나, 막상 해보니 안 될 때가 있습니다. 둘레에서는 다 할 수 없다고 손사래를 치지만, 정작 해보니 스스럼없이 풀리면서 어렵잖이 될 때가 있어요. ‘가능(可能)’은 “할 수 있거나 될 수 있음”을 뜻합니다. 무엇을 하고 싶은지 마음에 생각씨앗을 담으면, 우리 걸음걸이는 ‘이제부터 차근차근 할’ 일놀이를 바라봅니다. 무엇을 하고 싶은지 마음에 아무런 생각이 없다면, 쉬운 일도 그르치거나 어긋나곤 해요. 하려는 마음이 ‘할 수 있음’으로 흐르고, 하려는 마음이 없기에 ‘할 수 없음’으로 굳는구나 싶습니다. 아침에 해가 뜨고 저녁에 별이 돋는
[ 배달겨레소리 숲노래 글님 ] 숲노래 노래꽃 / 숲노래 동시 내가 안 쓰는 말. 기억 마음이 떠나고 나면 어쩐지 떠오르지 않고 마음이 따뜻이 피면 하나둘 떠올라 새록새록 마음이 죽어갈 때면 도무지 생각이 없고 마음이 살아날 적에 도로롱 생각이 솟아 아프고 슬프고 괴로워 멍울로 흉으로 새겼어 기쁘고 반갑고 흐뭇해 볼우물 눈웃음 되새겨 하나씩 적어 볼게 찬찬히 담으려 해 어제도 오늘도 이 마음을 돌아보고 돌이켜서 또렷이 ㅅㄴㄹ ‘기억(記憶)’은 “이전의 인상이나 경험을 의식 속에 간직하거나 도로 생각해 냄”을 가리킨다고 해요. 우리말로는 ‘생각하다·생각나다’나 ‘떠올리다·떠오르다’입니다. 물에 떠서 올라오듯, 마음이나 머리에 떠서 올라오듯 나타나는 일·말·이야기이기에 ‘떠올리다’라 해요. 오래도록 마음에 두고 싶으면 ‘담’습니다. ‘새기’기도 하고 ‘남기’기도 합니다. 두려 하기에 ‘두다’란 말로 나타내고 ‘되새기다·되돌아보다·되살리다·되짚다·되씹다’처럼 ‘되-’를 붙여 이모저모 살피곤 합니다. 그리고 ‘간직’합니다. ‘건사’합니다. ‘돌아보’거나 ‘그리’기도 하고, ‘품’기도 합니다. ‘품다’라는 낱말은 “품에 있도록 하다”를 가리켜
[ 배달겨레소리 숲노래 글님 ] 숲노래 노래꽃 / 숲노래 동시 내가 안 쓰는 말. 상상 새벽에 멧새노래로 일어나 아침에 오늘살림을 그리고 낮에 벌나비처럼 날다가 저녁에 별빛으로 잠들어 마음에 품는 생각이란 앞으로 이루려는 꿈씨앗 마음에 담는 말글이란 이제부터 가꾸는 얘기꽃 하늘과 땅 사이를 날고 너랑 나 사이를 넘나들고 별과 별 사이를 누리고 마음과 마음 사이를 만나 가만히 그리면 나타나 생각하는 대로 생겨나 날아드는 빛이 일어나 꿈짓는 하루가 거듭나 ㅅㄴㄹ 뜻을 알면 길을 열고, 말을 알면 마음을 읽고, 속을 알면 씨앗을 심습니다. ‘상상(想像)’은 “실제로 경험하지 않은 현상이나 사물에 대하여 마음속으로 그려 봄”을 뜻한다고 해요. 아직 겪지 않은 길을 미리 그리는 일이라면 ‘그림’이요, ‘꿈’입니다. 우리는 하루를 가만히 그리면서 아침을 열 적에 스스로 기쁘게 삶을 누려요. 어제까지 이루거나 해내지 못 했기에, 이튿날에는 꼭 이루거나 해보고 싶다는 꿈을 품고서 밤에 잠들기에, 아침에 눈을 번쩍 뜨면서 기운이 솟아요. 사람들 누구나 아기로 태어날 적에는 말길을 트지 못 합니다만, 어버이하고 눈을 마주하면서 소리를 듣던 어느 날부터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글님 ] 우리말 18 날개 다리밑에 줄지은 비둘기를 보았습니다. 벼랑에서 바위를 타는 염소가 이 같은 모습일까 싶습니다. 나무가 우거진 숲에서라면 비둘기가 아슬아슬하게 다리밑 틈바구니에 깃들지 않습니다. 나뭇가지에 앉는 비둘기라면 가만가만 노래하다가 훌쩍 날아서 다른 나무에 앉고, 하늘을 부드러이 가로지릅니다. 대구는 서울보다 작아도, 비둘기한테 그리 살갑지 않습니다. 서울도 비둘기한테는 사근사근하지 않겠지요. 나무도 숲도 먼 이 커다란 고장에 비둘기는 어쩐 일인지 우리 곁에 있습니다. 아무래도 먼 옛날에는 대구도 서울도 숲이었기에, 비둘기는 숲이던 이 터를 잊지 못 하는 듯싶습니다. 일이 바빠 책 한 자락 읽을 틈조차 없었습니다. 버겁고 바쁘던 일을 매듭지으면, 이제 책도 읽고 글도 쓰고, 책마실도 다닐 수 있을까 모르겠습니다. 날개를 활짝 펴고서 온하루를 훨훨 누비고 싶습니다. 2024. 3. 2. 숲하루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게 삶으로 87 씨앗에서 삶으로 《씨앗철학》 변현단 들녘 2020.3.13. 뒷산을 내려오다가 나팔꽃씨를 네 알 따서 주머니에 넣었다. 집으로 돌아온 뒤에 창가 흙에 바로 놓았다. 흙을 살살 뿌려서 씨앗을 덮었다. 앞으로 나팔꽃씨는 어떻게 자랄는지 궁금하다. 싹이 트는 모습부터 지켜보고 싶다. 《씨앗철학》을 읽었다. 이 책은 뿌리기, 자람기, 맺기, 이렇게 세 갈래로 이야기를 들려준다. 올봄 개구리가 깨어나던 무렵에 한멧줄기(백두대간)에 간 적이 있다. 문학답사를 하는 모임에서 갔는데, 이때 나는 ‘씨앗집(씨드볼트)’라는 데를 멀리서나마 보고 싶었다. 볼 수 있을지 모임 분들한테 여쭈니, 다들 이곳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듯싶다. 날마다 먹는 밥을 돌아본다. 예전에는 밥을 버리기가 아깝다고 여겼는데, 어느 때부터인가 밥알도 씨앗 한 톨이라는 대목을 떠올린다. 어릴 적에 엄마아빠가 논밭을 지을 적에는 미처 느끼지 못 하다가, 요즈음 들어서야 새삼스레 되새긴다. 씨앗으로 깨어나서 나한테 밥이 되어 주는 쌀알을 고맙게 여기면서 박박 긁어서 한 톨도 안 남기고 먹는다. 《씨앗철학》은, 씨앗이나 사람이나 다르지 않다고 들려준다. 씨앗
[ 배달겨레소리 숲노래 글님 ] '오늘말’은 오늘 하루 생각해 보는 우리말 이야기입니다. 이 낱말 하나를 혀에 얹고 눈으로 보고 손으로 적으면서 생각을 새롭게 가꾸어 보기를 바랍니다. 숲노래 우리말 오늘말. 착착 돈이 되나 안 되나로 따지면 삶이 메마릅니다. 벌이가 되는 곳으로만 가기에 살림이 고단합니다. 벌잇거리를 움켜쥐기에 얼핏 주머니가 찰랑찰랑한 듯싶지요. 그러나 돈나물을 바라보는 사이에 돈마음으로 물들고 돈사람이 되고 말아요. 풀냄새도 꽃냄새도 잃고서 돈냄새에 찌들어요. 뭔가 거머쥐려 하기에 나쁘다고는 여기지 않으나, 자꾸 쥐어삼키려 하기에 그만 산송장 같은 하루로 치닫습니다. 사랑하고 등진 몸이라면 산주검이에요. 아이랑 노래하는 오늘을 누리지 않는다면, 아무래도 넋을 잃은 허깨비 같아요. 굴레는 스스럼없이 털어요. 수렁에서는 서슴없이 나가요. 쳇바퀴는 냉큼 떨쳐요. 우리를 휩쓸려는 물결이 사나우면 기꺼이 앞장서서 푸른노래를 불러요. 스스로 참다우며 어질게 마음을 가꿀 줄 알면, 어떤 물결이나 바람도 우리를 못 건드립니다. 한 발을 척 내딛어요. 두 발 석 발 척척 나아가요. 착착 감겨들듯 스미는 햇볕을 듬뿍 쬐면서 소매를 걷어요. 구름을 안고 멧
[ 배달겨레소리 숲노래 글님 ] '오늘말’은 오늘 하루 생각해 보는 우리말 이야기입니다. 이 낱말 하나를 혀에 얹고 눈으로 보고 손으로 적으면서 생각을 새롭게 가꾸어 보기를 바랍니다. 숲노래 우리말 오늘말. 앗기다 서로 자리를 바꾸고서 생각한다면, 혼잣짓에 사로잡히지 않겠지요. 누구나 스스로 속마음을 바라볼 줄 아는 눈망울로 서로 헤아릴 수 있어야 따사로이 만나면서 토닥토닥 다독여요. 이렇게 하면 밑진다거나 잃는다고 여기면 아무 일을 못 해요. 어떤 이는 이녁 길미만 따지면서 혼자 올라가려고 합니다. 남이 앗기는 줄 모르지요. 혼놀이를 하듯 저만 좋아서 웃는 이가 있어요. 옆사람이 피흘려도 모르고, 둘레에서 나가떨어지면서 아파하더라도 못 느끼더군요. 배부르기를 바라고, 얻거나 벌기를 바란다면, 먼저 스스럼없이 셈평을 내보낼 줄 알아야지 싶어요. 나무가 자라려면 가랑잎을 떨구어야 합니다. 열매를 맺으려면 꽃이 져야 합니다. 씨앗을 퍼뜨리려면 열매를 새나 사람이나 숲짐승한테 내주어야 합니다. 빚지기만 하는 일이란 없습니다. 이 삶은 나쁘기만 하지 않아요. 울음하고 웃음이 언제나 나란히 흐릅니다. 스스로 달래고, 동무를 쓰다듬고, 이웃을 어루만지는 숨결은 나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