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게 삶으로 060 보리 한 톨과 글 한 줌 《작은 책방》 엘리너 파전 지음 에드워드 아디존 그림 햇살과나무꾼 옮김 길벗어린이 1997.1.30. 내가 어릴 적에 내 손은 책보다 흙을 더 만졌다. 공기놀이, 제기차기, 땅따먹기, 그림 그리기를 마당이나 흙길에서 했다. 경북 의성 멧골자락 시골집인데, 예전에 이런 시골에서 집안에 책을 쌓아놓고 볼 어버이가 있었을까. 우리 어버이조차 흙을 일구는 삶이었고, 우리는 책을 읽고 싶을 나이에 책은 우리한테 너무 멀리 있었다. 《작은 책방》을 쓴 엘리너 파전 님은 “책 없이 사는 것보다 옷 없이 사는 것이 더 자연스러웠다”고 이야기한다. “책을 읽지 않는 것은 밥을 먹지 않는 것만큼이나 이상하게 생각하던 시절”을 보냈다고도 한다. 이런 이야기를 읽으니 어쩐지 이 책을 쓴 분이 부럽다. 글님은 어린날 책을 읽는 재미가 얼마나 달콤했을까. 나는 시골에서 태어나 살았기에, 또 우리 어버이 살림이 넉넉하지 않아서, 어버이도 거의 배우지 못 한 삶을 보내셔서, 이래저래 책하고는 담을 쌓으며 자랐다. 여태 못 읽은 책에, 새로 나온 책에, 온통 못 본 책뿐이다. 우리 아들은 한때 책에 파묻혀 보낸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게 삶으로 059 돈과 바꾼 목숨줄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로맹 가리 지음 김남주 옮김 문학동네 2001.11.10. 집에 있는 어느 책을 찾다가 못 찾았다. 이것저것 집다가 몇 줄 읽고 덮다가 문득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를 펼친다. 짧게 쓴 글을 모으면서 첫 글로 책이름을 땄다. 몇 쪽 읽을 즈음 짝한테서 전화가 온다. 운동을 한다며 나갔는데 갑자기 가슴 쪽이 아파서 꼼짝을 못 한단다. 책은 얼른 덮고서 바삐 태우러 간다. 언덕에서 짝을 태워 바로 대학병원 응급실로 갔다. 처음에는 거짓인 줄 알았다. 가슴이 아픈 사람이 말을 너무나 씩씩하게 하더라. 게다가 아침에 무를 깎다가 엄지손가락을 베어 피가 조금 났다. 다친 손이라고 그런지 모르지만, 아침에 나가다가 다시 들어와서 “내가 이따 와서 쓰레기 버릴게.” 하고 말하고 간 사람인데, 병원에서 하루를 묵을 줄 몰랐다. 병실이 없다기에 응급실에서 하룻밤을 보내는데 피를 묽게 하더라. 병원에 온 지 열두 시간이 지나고서야 들여다본다. 날핏줄(동맥)로 무얼 넣어서 핏줄을 뚫고 넓힌다더라. 짝은 미리 몸을 풀지 않고서 갑자기 운동을 거세게 하느라 핏줄이 막혔단다. 큰일이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게 삶으로 058 글을 쓰는 여자 《카이니스의 황금새 1》 하타 카즈키 지음 정혜영 옮김 YNK MEDIA 2020.10.10. 만화책 《카이니스의 황금새 1》를 읽었다. 예전 영국에서 소설을 쓰는 여자를 다룬다. 주인공 리아가 앨렌으로 꾸민다. 여자라는 몸을 남자처럼 바꾼다. ‘여자는 글을 쓰면 안 된다’고 여길 뿐 아니라, ‘여자 주제에 소설을 쓸 수 없다’고 얕보던 무렵이라, ‘여자인 리아로 쓴 소설’이지만 ‘남자처럼 꾸민 앨런이 쓴 글’이라고 숨겨서 내놓는다. 글을 쓰며 살아가는 꿈을 키우고 싶은 리아는 시골을 떠나서 런던으로 가려고 한다. 소설이든 글이든 누구나 쓸 수 있고, 그야말로 누구나 배우며 꿈을 펼 수 있는데, 성별로 가르고 따돌리는 굴레가 너무 단단하기에 남자처럼 꾸미기로 한다. 머리카락을 짧게 치고, 앞가슴을 가리고, 바지를 입는다. 나중에 소설이 널리 읽히면 그때에 비로소 ‘나는 여자이지만, 이렇게 여자도 남자와 똑같이 소설을 쓸 수 있습니다’ 하고 밝히자고 생각한다. 그제 짝하고 주고받은 말을 떠올린다. 밥을 먹던 짝은 “내가 먼저 죽으면 시골 물려받은 땅 팔지 말고 아들한테 그대로 물려줘라” 하고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게 삶으로 57 가을 감잎 《토리빵 2》 토리노 난코 이혁진 옮김 AK 커뮤니케이션즈 2011.3.5. 《토리빵 2》을 보면 처음에 감잎이 나온다. 다시 보아도 참 곱다. 감잎은 붉은빛이 가장 돌 적에 곱다고 느낀다. 푸릇하던 잎이 발갛게 물들면서 새롭게 오는 철을 알려주는 듯하다. 올해는 감잎에 홀딱 반했다. 곱게 물든 가랑잎을 책에 끼워 놓으면 이내 바랜다. 단풍나무잎만 붉은 그대로 있지만, 여느 잎은 노랗고 빨갛게 곱던 잎이 흙빛이 되더라. 감잎을 몇 군데서 땄다. 팔공산에서 만난 감잎은 크고 아직 푸릇했다. 팔공산 미술관 옆 빈터에 감나무 한 그루 있는데, 잎이 손바닥보다 크고 붉게 물들었다. 몇 자락을 땄다. 계명대 뜰에서 만난 감나무는 잎이 몇 안 남았는데 가장 빨갛게 물이 들었다. 팔이 닿는 데까지만 감잎을 따 보았다. 《토리빵 2》을 읽다가 큰아이 어린 날을 떠올린다. 세이레 동안 젖을 먹이고서 시골집에 맡기고 일을 하러 나갔는데, 큰아이는 시골집에서 걸음마을 뗀 뒤로는 닭하고 오리하고 놀았다. 등겨를 떠서 부어 주면, 닭은 한쪽으로 몰려서 우리 딸을 지켜보곤 했다. 시골을 가까이서 보며 자란 큰딸인데, 이젠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게 삶으로 56 시골로 떠난 서울사람 《머리를 자르러 왔습니다 1》 타카하시 신 정은 옮김 대원씨아이 2021.9.8. 요즘은 시집보다 만화책에 흠뻑 빠진다. 엊그제 《머리를 자르러 왔습니다 1》를 읽었다. 도무지 알아듣기 어려운 요즈음 시보다는, 이름난 시인을 흉내낸 듯한 시보다는, 우리 삶을 꾸밈없이 담아내는 만화책에 끌린다. 만화책 《머리를 자르러 왔습니다 1》에는 ‘혼자살기’에 익숙한 젊은 아버지가 나온다. 이이는 사랑하는 짝을 만나서 도쿄에서 함께 살아왔지만, 둘이 일구는 삶을 짊어지지 못 하고 달아나려고 했다. 짝도 마주하지 못 하고, 아이도 바라보지 못 하는 채 살던 젊은이는 도쿄를 떠나 작은 섬마을로 삶터를 옮긴다. 아이는 젊은 아버지를 따라 섬마을로 터전을 옮긴다. 그러니까 서울(도쿄)에서 달아나 시골(섬)에서 새터를 일구려고 하는 줄거리를 다루는 만화책이다. 번듯번듯하고 숨을 쉴 틈이 없이 빽빽한 서울을 떠난 두 사람(아버지와 아들)은 낯선 시골(섬)에서 모든 것이 어렵고 어찌할 바를 모른다. 젊은 아버지는 더더욱 벅차다. 그러나 어린 아들은 말없이 아버지를 이끌고, 천장이 뚫린 허름한 시골집이 오히려 둘이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게 삶으로 055 겉모습이 아닌 《책상은 책상이다》 페터 빅셀 이용숙 옮김 워즈덤하우스 2001.10.20. 《책상은 책상이다》를 다섯 해 만에 다시 읽는다. 이 책은 동화라고도 하는데, 동화가 맞나 갸우뚱해 본다. 그러나 1969년에 처음 나온 글이니, 그무렵에는 아이한테도 어른한테도 동화로 읽힐 수 있었는지 모르지. 얼핏 점잖은 체하는 사람들 이야기가 나온다. 얼핏 다 알거나 잘난 척하는 사람들 이야기가 나온다. 아무것도 없는데 마치 있는 듯 꾸미는 사람들 이야기가 나온다. 가만히 보면, 《책상은 책상이다》에 나오는 사람들 이야기는 겉과 속이 다른 모습이다. ‘안다’고 여기는 길이 참말로 ‘안다’고 할 수 있는지 모두 허물고서 처음부터 다시 돌아보는 줄거리 같다. 우리 가게는 아침 일곱 시 반에 열고 밤 열한 시 반에 닫는다. 한 해 내내 쉬지 않고 연다. 늦게 연다고 뭐라는 사람이 없을 테지만, 가게를 닫는다고 뭐라고 할 사람은 없겠지만, 손님과 말없이 맺은 다짐인 셈이다. 아프거나 집안일이 있거나 어디 바람을 쐬고 싶어도 가게를 닫지 못 한다. ‘책상은 책상이다’ 꼭지를 돌아본다. 말놀이에 글놀이 같고, 말장난 같기도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게 삶으로 054 아프던 어제 《눈을 감고 보는 길》 정채봉 샘터 2006.1.9. 《눈을 감고 보는 길》을 읽었다. 글쓴이가 죽음을 앞두고 쓴 글을 모은 책이다. 곧 몸을 내려놓아야 할 날을 알아채고서 병원에서 쓴 글이다. 머잖아 더는 글을 쓸 수도 책을 읽을 수도 없는 몸인데, 마지막으로 남기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문득 생각해 본다. 나는 여태 병원에 어떤 일로 얼마나 드나들었을까. 아이를 셋 낳는다면서 병원에 가서 배를 갈랐다. 곪은 멍을 뽑아내야 한대서 갔다. 건강검진을 해야 해서 드나들기도 한다. 무릎이 삐걱거리면서 뒤틀리듯 아파서 병원에 들어간 때도 있다. 이때에는 다리에 무거운 쇠를 박았고, 한 달 동안 병원에 몸져누우면서 잠을 거의 못 잤다. 진통제를 먹고서야 가까스로 눈을 붙였다. 다리를 째고 쇠를 박고 아물어야 했으니 얼마나 아팠던가. 오금이 저리고 저절로 아야 소리가 터져나왔다. 한 달이 지나고서는 바퀴걸상을 석 달 탔다. 겨우 나무발을 짚고 일어서며 다시 걷는 훈련을 했는데, 이 여러 달에 걸쳐 일기는 엄두도 안 났다. 아무리 바쁘고 힘들어도 일기는 꼬박꼬박 썼는데, 이때에는 아무 생각도 못 하며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게 삶으로 053 이름값 《달에서의 하룻밤》 패티 스미스 김선형 옮김 마음산책 2021.2.15. 《달에서의 하룻밤》은 막 나와서 책집에 깔리던 2021년에 처음 사서 읽었다. 그때에는 좋았다고 느꼈는데, 요 며칠 사이에 다시 읽으니 아니더라. 소설이라기에는 심심하고 여행일지라기에는 더 심심하다. 자서전도 아니고 회고록도 아니다. 어느 한 대목도 내 마음을 찡하게 울리지 못 한다. 그런데 이태 앞서 읽을 적에는 왜 좋았다고 느꼈을까. 예전에는 못 보고 오늘은 보이는 이 틈새는 뭘까? 곰곰이 짚어 본다. 《달에서의 하룻밤》은 방바닥에 이것저것 늘어놓은 듯이 시시콜콜 되는 대로 적은 글 같다. 뭔가 잔뜩 펼치려고 하지만 막상 하나도 잇닿지 않고 어지럽달까. 술집 이야기를 하다가 대뜸 책 이야기를 하다가, 어디에서 글을 써 달라는, 이른바 청탁으로 글을 쓰는 이야기가 나오더니, 갑자기 모든 글은 가슴(심장)에서 나온다고 맺는데, 어쩐지 겉멋만 부리는 글잔치 같다. 책을 덮고서 한숨을 쉰다. 그래, 지난 2021년에 나는 아직 이름값(프로필)에 휘둘려서 책을 샀고 읽었다. 이름값이 높다는 사람들이 쓴 책을 읽어야, 나도 글쓰기를 잘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게 삶으로 052 내가 쓰고 싶은 글 《천재 유교수의 생활 2》 야마시타 카즈미 소년 매거진 찬스 학산문화사 1996.12.25. 어제 글잔치(백일장)에서 심사를 처음 맡아 보았다. 다른 사람들이 여러 가지를 하는 동안, 나는 심사위원으로서 글을 읽고 뽑는다. 어르신들이 쓴 글은 짧고 투박했다. 거의 모든 분들이 “선생님 고맙습니다” 같은 글만 적으셨다. 어르신들 마음을 담아내지 못 했다. 글을 이제 처음으로 배운 어르신들은 하고픈 말이 많을 텐데, 하나같이 “글을 배워서 좋다”는 말뿐이더라. 심사를 마치고 밥자리로 옮겼다. 함께 심사를 맡은 어떤 분이 ‘이름난 사람들’하고 어울리면서 술을 곤드레만드레 마신 일을 늘어놓는다. 그렇게 ‘이름난 사람들’하고 어울리고 술도 잔뜩 마셔야 좋은 글이 나온다면서, 바르게 살아서는 좋은 글이 나오지 않는다고 못을 박는다. 이분 말씀을 한참 듣다가 “그렇게 집밖으로 돌지 않고도 반듯하게 마음을 다스리며 글을 쓸 수 있다”고 대꾸했다. 그분 말마따나 글 좀 써 보겠다면서 흥청망청 마시며 어울리면 무엇을 배울까? 그렇게 배워서 쓰는 글이라면 집안은 뒷전이다. 내 대꾸에 그분은 그동안 집안에 마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게 삶으로 051 한 그루 나무 《랩걸》 호프 자런 김희정 옮김 알마 2017.2.16. 지난해 여름에 어느 이웃이 《랩걸》이 좋으니 읽어 보라고 했다. 그분은 하루에 몇 쪽씩 아껴가면서 읽는다고 했다. 참 좋은 책인가 하고 여기다가 다른 이웃한테 《랩걸》을 사서 읽으려 한다는 이야기를 했더니, 《풀꽃나무하고 놀던 나날》이 훨씬 낫다고 하더라. 이분 얘기로는, 과학자는 나무를 과학으로 볼 뿐이라서, 나무 마음에 다가서지 않는다고 하더라. 이와 달리 《풀꽃나무하고 놀던 나날》은 나무를 오롯이 나무로 바라보고서 마음으로 다가서려고 하기에 ‘과학자 아닌 사람’이 쓴 책이 나무도 풀꽃도 제대로 풀어내어 들려준다고 하더라. 그러고 보니, 사백 쪽을 웃도는 두꺼운 책에는 ‘나무, 과학 그리고 사랑’이라고 적혔다. 아무래도 나는 이 말에 낚인 듯하다. 나무도 사랑도 아닌, 나무를 앞세워 ‘여성 과학자’라는 이름을 풀어놓은 줄거리이다. 그래, 글쓴이는 나무를 본 적이 없구나. 실험실에서만 사느라, 나무를 기웃거린 적은 있고, 나무를 뜯은 적은 있어도, 나무가 나무로 살아가는 숲을 품으면서 살아간 적은 없구나. 내가 일하는 가게 모퉁이에 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