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게 삶으로 74 낚이다 《풀의 향기》 알랭 코르뱅 이선민 옮김 돌배나무 2020.06.10. 아침햇살을 본다. 땅바닥을 덮은 풀잎에 이슬이 앉았다. 이슬은 하얗게 얼었다. 햇볕이 오르자 언 이슬이 녹고는 물방울이 맺는다. 얼마나 추웠을까 하고 풀을 걱정하려다가, 오히려 내 마음이 푸르게 녹는다. 이 추위에도 긴밤을 보내고, 얼음 녹은 이슬을 품는구나. 《풀의 향기》를 편다. 풀내음을 느껴 보고 싶어서 죽죽 읽는데, 어쩐지 풀빛이나 풀냄새가 나지 않는다. 그냥그냥 다른 사람들 글이나 책을 따서 엮었을 뿐이로구나 싶다. 풀을 보았으면, 풀을 본 마음을 적으면 될 텐데. 풀을 한 포기 손바닥에 얹었으면, 풀냄새를 맡은 이야기를 풀어내면 될 텐데. 나는 어릴 적에 목장을 해보고 싶었다. 풀밭에서 말이 풀을 뜯어먹는 모습을 그렸고, 언덕을 온통 푸르게 뒤덮은 들판을 그려 보았다. 태어나서 자란 의성 멧골 시골집에는 소 한 마리 겨우 있었는데, 얌전한 짐승을 품는 농장을 꾸리고 싶었다. 의성은 예나 이제나 깊디깊이 숲이다. 우리 집도 이웃도 숲에 둘러싸였다. 마을은 온통 숲이었다. 맨발에 맨손으로 뛰고 달리고 나무를 탔다. 그런데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게 삶으로 73 노예인 삶 《붓다 2》 테즈카 오사무 최윤정 옮김 학산문화사 2011.05.25. 《붓다 2》을 펼친다. 노예 차프라는 무사 집안으로 들어갔다. 어느 날 코끼리를 타고 지나가는데, 엄마가 아들 차프라를 부르지만 아는 척을 안 한다. 이제는 노예가 아닌 귀족인 차프라는, 노예라는 몸인 엄마를 등진다. 엄마는 아이를 만나지 못한다. 사람을 가르는 금인 신분은 왜 생겼을까. 나라를 빼앗고 뺏는 동안 우두머리나 돈이나 이름값을 가진 사람이 잣대를 지었을 테지. 요즘도 이런 금(신분 차별)이 사라지지 않았다고 본다. 만화책을 덮고서 우리 가게 일을 떠올려 본다. 이제는 가게를 접으려고 한다. 마땅한 다른 임자한테 넘겨줄 생각이다. 그동안 집임자(건물주)한테 삯을 주면서 가게를 꾸려 왔는데, 집임자는 달삯도 보증금도 턱없이 올리려고만 하고, 우리 가게를 넘겨받을 사람들이 나왔을 적에도 뒤에서 자꾸 헤살을 놓는다. 지난 한 달 내내 피고름을 짜는 듯했다. 뜬금없이 토를 달고, 이리저리 휘두르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너무 어이없어서 방송 같은 데라도 터뜨리고 싶다는 말을 하니, 그제서야 조금 누그러지더라. 가슴이 두근두근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게 삶으로 72 숲사랑으로 《회색곰 왑의 삶》 어니스트 톰슨 시튼 장석봉 옮김 지호 2002.12.27. 《회색곰 왑의 삶》에는 세 가지 이야기가 흐르면서 맞물리는데 무엇보다도 왑이라는 이름인 곰 이야기가 도드라진다. 잿빛곰인 왑은 처음에는 어미 품에서 자란다. 개미와 땅벌레를 핥아먹고, 물고기를 잡고, 딸기를 훑으면서, 또래와 장난을 치며 잘 지낸다. 이러던 어느 날, 사람들이 키우는 소가 새끼 곰을 괴롭히려 한다. 어미 곰은 얼른 새끼 곰을 지키려고 소한테 덤빈다. 그러나 사람들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따지거나 살피지 않는다. 무턱대고 커다란 곰부터 쏘아죽이려 한다. 새끼 곰이던 왑은 하루아침에 어미를 잃는다. 그만 외톨이까지 된다. 사랑받으며 자라야 할 때에 사랑은커녕 끔찍한 죽음만 보고 만 나머지, 그만 이때부터 모두 미워한다. 숲짐승도 사람도 다 밉다. 더구나 왑은 어느 날 덫에 걸려 발가락까지 잃는다. 왑은 더욱 미움이 자라고, 쇠붙이 냄새만 나도 으르렁거린다. 왑은 살아간다. 아무리 힘들고 외로워도 꿋꿋하게 살아간다. 봄에는 겨우내 얼어 죽은 짐승을 먹는다. 여름에는 나리와 튤립과 산딸기를 멧기슭에서 먹는다.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우리말 6 밤하늘 땅거미가 지면 밤은 하루를 토닥토닥 고요히 재웁니다. 자다가 깼어요. 별님이 똑똑 두드려요. 밖을 보니 달무리가 있어요. 차고 기울고, 기울다가 다시 차오르는 달빛을 봅니다. 별도 달도 하늬쪽으로 한 뼘 옮겨요. 새녘에 반짝이는 별을 봐요. 깜빡깜빡 불을 켠 날개가 밤하늘을 갈라요. 여름이면 시골집 마당에 누워 별을 헤아렸어요. 닻별을 살피고 국자별을 찾으면 붙박이별은 쉽게 보여요. 별똥별을 보면 아기가 태어나거나 누가 돌아간다고 믿었어요. 밤빛이 들어왔어요. 책상맡과 머리맡이 환해요. 밤바다에는 윤슬이, 들숲에는 풀꽃나무가 별빛이랑 속삭여요. 밤새도록 사랑이 흘러요. 달은 햇빛에 튕겨 빛나고, 별님은 스스로 빛나요. 갓밝이에 샛별이 빛나요. 밤하늘은 별빛과 별노래로 꽉 차요. 그런데 이 많은 별이 어디로 갔을까요. 쏟아지는 미리내를 보고 싶습니다. 스스로 빛나는 별을 닮고 싶습니다. 2023.12. 28. 숲하루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게 삶으로 71 새소리 붕붕소리 《작은 새가 좋아요》 나카가와 치히로 사과나무 옮김 크레용하우스 2002.8.1. 《작은 새가 좋아요》를 읽었다. 우리 발은 땅을 밟고 있어도 몸은 하늘에 있는 셈이다. 바닥을 버티는 발이 우리가 폴짝 뛸 때처럼 뜬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발을 잡아당기는 힘을 이기고 땅을 벗어나는 새처럼 날까. 새는 가벼운 몸에 마음은 얼마나 가벼워서 날까. 마음이 무거울 때 하늘을 바라보며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처럼 날고 싶은 생각을 으레 꿈꾸었다. 그림책 《작은 새가 좋아요》를 돌아본다. 작은 아이는 작은 새처럼, 스스로 새가 되어 노래하는 꿈을 그린다. 그리고 작은 아이 곁을 온통 새밭으로 바꾸는 마음으로 살아간다. 우리 집 창가에 물을 떠놓고 모이도 놓는다. 이 그림책을 알기 앞서부터 새가 찾아오기를 기다리며 이렇게 지낸다. 어느 날은 까치가 짝을 지어 오고, 어느 날은 어린 까치가 오고, 어느 날은 까마귀가 오고, 어느 날은 비둘기가 온다. 요즘은 직박구리가 자주 찾아온다. 직박구리는 곁에 비둘기가 내려앉아서 물을 먹어도 꼭 노래를 부르더라. 직박구리는 한참 앉아서 두리번두리번한다. 물 한 모금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게 삶으로 70 그림책 읽기어주기 《날아라, 꼬마 지빠귀야》 볼프 에를브루흐 김경연 옮김 웅진주니어 2006.11.15. 아침을 먹고 티브이를 보는 짝한테 “그림책 읽어 줄까?” 하고 묻는다. 고개를 끄떡한다. 짝한테 다가간다. 바닥에 그림책을 셋 내려놓는다. “자, 하나 골라 보소.” 짝은 《생쥐와 고래》하고 《작은 새가 좋아요》하고 《날아라, 꼬마 지빠귀야》를 보더니 《날아라, 꼬마 지빠귀야》를 손짓한다. 티브이를 끈다. 그림책은 그림을 함께 보아야 하니 나란히 앉아야 한다. 짝 곁에 앉아서 천천히 넘긴다. 첫 쪽을 펼쳤다. 자리 등받이에 검은 지빠귀가 앉았다. 다음 쪽을 보니, 아주머니는 다림질을 하고, 사다리에 올라가고, 차를 마신다. 이윽고 딸기코 아저씨가 나온다. 천천히 그림을 살피라고 첫 쪽보다 오래 펼친다. 그런데, 그림을 보던 짝이 하품을 한다. 아직 소리내어 읽지도 않고 그림만 보여주었는데 벌써 하품을 하다니. 아이쿠나, 빨리 읽어야겠구나. 짝은 그림을 보고, 나는 글을 소리내어 읽는다. 예전에 아이한테 읽어 줄 적처럼 재미있게 말씨를 섞어서 읽어 주고 싶은데, 쑥스럽기도 하고, 따분해서 안 듣는다고 할까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우리말 5 발바닥 태어난 아기 발바닥을 착 찍어요. 통통한 발에 간지럼을 태우면 발가락이 꼼지락꼼지락 활짝 펴요. 어른은 발바닥을 한껏 오므려요. 까치발로 딛고 서다가 뒤꿈치를 써요. 맨바닥에서는 발바닥이 미끄러워요. 쭉쭉 발밀이를 해요. 발을 동동 굴러요. 어리광을 부리며 발부림을 쳐요. 지치도록 울며 발버둥도 쳐요. 발바닥은 발바심을 해요. 싫으면 발뺌하고요. 발삯을 받으려고 심부름도 잘해요. 발바닥은 우리 몸 기둥입니다. 뭉개거나 납작하게 하는 힘이 있어요. 발바닥 가운데는 무지개 꼴로 버팁니다. 몸이 앉거나 누우면 일어나 하늘을 봐요. 가끔 맨발로 걸으며 달랩니다. 땀을 흘리면 발가락 사이에서 고린내가 나요. 발바닥은 길라잡이입니다. 발이 지나가면 발자취를 남깁니다. 고마운 발을 따뜻하게 덮어줍니다. 발바닥을 믿고 스스로 삶을 다 걸어갑니다. 건너뛰지 않아요. 한 걸음 두 걸음 발밤발밤을 합니다. 2023.12.25. 숲하루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게 삶으로 69 느티나무 《물에서 나온 새》 정채봉 지음 샘터 2006.9.15. 《물에서 나온 새》를 읽었다. ‘어린새’ 이야기는 봉황과 허수아비를 다룬다. 짚으로 여민 몸에 마음이 들어와서 참말로 숨결이 있기를 바라는 허수아비는 들새를 불러서 쉬라 하고, 배를 채우라 하고 싶다. 그렇지만 스스로 들판에 선 허수아비가 아닌 터라, 허름한 옷을 걸친 채 들새를 훠이훠이 쫓아야 한다. 예전에 안동 도산면에서 일하던 날을 떠올린다. 그때 내가 살던 집에서 일터 사이는 오십사 킬로미터 길이었다. 오가는 길이 꽤 멀었는데, 오히려 길이 멀기에 철마다 다른 들빛과 꽃빛을 누리기도 했다. 도라지꽃을 보고, 허수아비를 만나고, 낯선 들꽃을 보면 이름이 뭘까 하고 한참 헤아리던 나날이다. 기차가 다니는 북후면 쪽으로 오갈 적에는 으레 일찍 기차역으로 나왔다. 혼자 논두렁길을 걸으며 벼냄새를 맡았다. 봄에는 매화를 보고, 꽃이 지면 시냇물을 보고, 철길을 건너 멧비탈을 다녀오기도 했다. 일터에서는 낮밥 즈음에 슬쩍 냇가로 가서 꽃을 보았고, 저물녘에는 별바라기를 했다. 곁에 있는 느티나무한테 가서 차도 마시고 빗소리도 들었다. 그런데 어느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게 삶으로 68 싸우는 곳 《싸우는 식물》 이나가키 히데히로 김선숙 옮김 더숲 2018.10.29. 《싸우는 식물》은 풀꽃이 풀꽃 나름대로 싸우면서 목숨을 이어간다는 줄거리를 들려준다. 그런데 참말로 풀꽃은 싸우면서 살까? 글쎄, 나는 잘 모르겠다. 풀꽃을 바라볼 적마다, 또 풀잎과 꽃송이를 쓰다듬을 적마다 온마음이 녹고 느긋한데, 싸우는 풀꽃이라면 내 마음도 사람들 마음도 달랠 수 없는 셈 아닐까? “싸우는 풀꽃”이 아닌 “어울리는 풀꽃”이라고 생각한다. 풀꽃과 나무로서는 언제나 어울리는 길일 테지만, 사람은 마치 싸운다고 잘못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엉키거나 얽히는 뿌리는 마치 싸움질 같아 보일 수 있겠지. 그러나 서로 만나고 아끼고 돌보려고 하면서 어우러지는 모습이라고 느낄 수 있지 않을까. 기운이 빠지는 일이 있어도, 대구 한복판 곳곳에서 돋는 풀꽃을 보면서 시름을 달래고 힘을 얻는다. 아무리 시멘트와 아스팔트로 꽁꽁 덮어도 풀싹은 어김없이 돋는다. 아무리 자동차가 끝없이 달려도 나무는 새잎을 내고 푸르다. 《싸우는 식물》은 이래저래 풀꽃 마음으로 이야기를 여미려고 했으리라 보지만, 조금 더 풀꽃한테 다가가서,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우리말 4 손바닥 손바닥에 물을 받아 입을 헹굽니다. 낯을 씻고 몸을 씻습니다. 손바닥은 몸 끝에서 바닥 일을 해요. 엎어지면 손바닥이 먼저 달려와요. 작다고 비웃으면 뺨을 때려요. 주먹다짐하면 별이 번쩍 떠요. 궂은일로 굳은살이 돋고, 손바닥에 허물이 살아요. 손바닥은 텃밭을 일구는 내 연장입니다. 손바닥은 땀이 나도록 일을 해요. 땅바닥은 흙이 덮고 냇바닥은 물이 덮고 손바닥은 무늬가 덮어요. 나를 활짝 여는 열쇠입니다. 나를 먹여살리는 밥줄이지요. 손뼉을 치고 싶고, 받고 싶습니다. 싫으면 손사래칩니다. 잘못하면 싹싹 빕니다. 매를 맞으면 손바닥은 비손을 올려요. 눈물을 훔치면 손바닥이 가려 줍니다. 하늘을 담지 못해도 하늘을 가려 줍니다. 손바닥으로 어루만지는 사랑손입니다. 손바닥에 떠오르는 아침해를 얹어 봅니다. 뭉게구름도 담아 봅니다. 멧바람도 담아 봅니다. 손바닥 보자기에 신바람이 춤을 춥니다. 2023.12.23. 숲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