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은삶 78] 나도 달리고 싶다
큰애가 설 때 집에 다녀간 뒤로 조용하다. 어거지로 한바탕 부린 일이 자꾸 마음에 걸렸는데 “나 20k 뗘져.” 하고 앙증맞게 쪽글을 보내었다. “많이 뛰었네. 넘 무리하지 말어.” 하고 맞글을 보냈더니 “최장거리얌 헤헤.” 하면서 한강을 따라 뛰던 길그림을 보내 온다.
이젠 적은 나이가 아닌데, 오래 달리네. 큰딸이 달리기를 한다니깐 좋다. 서울살이를 하며 잔뜩 머리를 짜며 일에서 벗어나려고 혼자서 달리는 일이다.
큰딸은 어릴 적에는 잘 달리지 못했다. 몸이 토실해서 그런지 달리면 끝자리를 맡아 두곤 했는데 요새는 하루에 20킬로미터를 달린단다. 큰딸이 대구집에 왔을 적에 함께 달리기를 따라간 적이 있다. 나는 길동무로 따라가기만 했을 뿐 달리지 않았다. 아니 달리지 못했다.
나는 어릴 적에는 달리기를 잘했다. 이러다가 열여덟 살 무렵에 100미터 달리기를 하는데 그만 29초에 끊었다. 남들보다 9초쯤 더 걸렸다. 늦은 9초에 부끄럼이 속 깊이 일어났다. 앞을 보고 온힘으로 달려야 할 때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멈칫멈칫하면서 고약한 점수가 되었다. 한껏 달릴 수 있었는데 멈춘 셈이다.
일곱 해 앞서부터는 달린 적이 없다. 달리지 못한다. 막내를 낳은 뒤로는 어린 날 일이 자꾸 떠올라서 스스로 티를 냈다. 어릴 적에 고작 하루 달리기를 잘 못 한 일이 자꾸 떠올라서 그저 부끄럽기만 했다.
이제는 부끄러움이 사라졌다. 가슴에 멍울이 터지고 나니 오히려 부끄러움을 감추지 않고 드러내면서 거리낌이 없는 나이가 되었다고나 할까. 그래도 아직 달리기를 하지는 못한다. 부끄러움이 사라지면 마음껏 달려야 할 텐데 마음이 다 나으니깐 이젠 몸이 아파서 뛰지 못한다. 느리게 달려도 부끄럽지 않은 오늘이지만, 이제는 함부로 달리다간 다리가 아파서 걸을 수 없다.
큰딸 나이가 부럽다. 큰딸은 딸린 아이도 없고 누구한테 밀리지 않아도 되고 오로지 혼자 누리는 하루를 홀가분하게 달리니까 부럽다. 나도 달리기를 할 수만 있다면 머리가 이렇게 자주 아프지 않을는지 모른다. 달리기를 하면 머리가 흔들려서 안 좋다고들 말하는 사람이 있지만, 달리기를 하면서 숨이 가쁘기도 하면, 오히려 몸에 기운이 차오르기도 하고, 책을 읽을 적에는 모르던 새바람이 온몸으로 스며들기도 할 테니까.
달리기를 할 수 없는 다리가 되고 보니, 안 되거나 할 수 없는 일을 부러워하는구나 싶은데, 달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내 몸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걸. 곰곰이 생각해 본다. 예전에는 내가 할 수 있던 일을 뭔가 부끄럽다고 숨기거나 빼면서 때를 놓친 일이 많았다고 두고두고 돌아본다. 이제는 그날, 이 하루, 하루하루에 내 앞에 닥치면 비껴 가려고 하지 말고 부끄럼도 타지 말고 쭉 나아가자고 생각한다. 아낌없이 하루를 탈탈 털어서 쓰자. 돌아보며 티끌이 남을 일은 하지 말자. 느릿느릿이어도 천천히 달리기를 할 날을 그려 보자.
2023. 02. 20. 숲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