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은삶 47] 개미취
이틀 꽃구경을 했다. 햇살이 머리를 지날 무렵이라 얼굴이 익어도 꽃을 보는 일이 즐거웠다. 꽃 구경하는 김에 꽃이 지면 아쉽지 않게 멧골 아닌 개미취 꽃밭으로 간다. 꽃이 마음을 빼앗아 간다기보다, 꽃을 보면 눈빛을 거쳐 온몸에 가슴에 허파에 꽃이 가득 핀다고 느낀다. 꽃이 질 적에 보기 흉하다고 여겨 멀리하려 했는데, 문득 눈을 돌리니 꽃이 가장 아름다울 때를 놓치겠구나 싶더라. 한 잎 두 잎 꽃망울을 품고 꽃송이 하나 피워내려고 줄기를 키우고 키워, 튼튼히 길을 낸 풀줄기가 마침내 꽃망울을 터뜨리려고 온힘을 쏟아낸 꽃바다가 보고 싶다. 쑥부쟁이 닮은 바위취꽃이 비탈진 자리를 아름다이 밝힌다.
우리보다 먼저 온 줄이 길다. 나무 밑에 자리가 났다. 바로 앞에 보랏빛 꽃밭으로 들어간다. 어제 본 해바라기보다 이 꽃이 더 크다. 내 키를 훌쩍 넘어도 줄기가 꼿꼿하다. 사람이 낸 길을 따라 들어갔다. 깨금발을 디뎌도 꽃 너머 밭둑을 보아도 안 보인다. 이 좋은 꽃밭을 두고 저 건너 솔밭으로 간다. 아마 더 넓게 꽃바다가 있겠지. 해도 살짝 숨어서 우리를 보는가. 구름을 한 겹 가려놓았다.
솔밭으로 들어가니 꽃밭이 있다. 사람이 안 들어가는 꽃밭을 둘러보는 일이 재밌다. 그곳에서 꽃을 보는 사이 곁님은 절로 들어가는 돈을 낸다. 도토리묵을 준다는 말에 바로 공양간으로 갔다. 뜰에 사람들이 붐빈다. 웅덩이가 있는 너럭바위 뒤에 소나무 한 그루가 그림같아서 사람들이 줄을 서서 찍는다. 이 맛있는 도토리묵을 먹었을까. 작은 접시에 네 조각씩 담긴 묵을 간장을 뿌려 먹는다. 배가 고프던 때라 한 접시 더 얻어먹는다. 시골에서 삭힌 간장맛이라 양념이 맛있다. 도토리묵도 떫지 않고 시골에서 손수 주워 쑨 묵이구나 싶다.
한쪽에는 개미취 꽃다발을 판다. 한 움큼씩 띠로 묶었다. 한 다발에 오천 원이다. 개미취에서 뜯은 나뭇잎을 말린 ‘취나물’도 판다. 이 많은 개미취 꽃밭을 가꾸려면 돈이 들겠지. 일어나 뜰을 걷는다. 늙은 개 한 마리 누웠기에 다가가니 나무에서 도토리가 뚝 떨어진다. 잿빛 개 눈이 발갛다. 눈을 마주치자 살짝 돌리는 개한테, 이리 오라고 손짓을 하니 기지개를 켜고 나온다. 머리를 쓰다듬으려고 하는데 곁님이 만지지 말라고 한다. “다시 들어가, 갈게.” 하고서 우리는 뒤쪽으로 올라갔다.
사람이 꽃밭에 폭 쌓였다. 얼굴만 동동 떠다닌다. 곁님이 시키는 대로 나도 꽃밭에 들어갔다. 곁님이 이젠 사진 찍는 솜씨가 늘었는걸. 뒷모습을 찍는 내 마음을 잘 읽고 짜증도 내지 않는다. 사람을 비껴 꽃밭을 들어갔다 나왔다 또 들어갔다 하는 동안 곁님 얼굴빛이 확 핀다. 나도 얼굴이 확 핀다. 꽃을 보면 마음이 이런가. 굳은 얼굴이 풀리니 입을 다물어도 낯빛은 웃는다. 꽃하고 노는 사이 꽃처럼 마음결이 따르는가. 잔뜩 본 꽃이 우리 얼굴에 그대로 스민 듯 우리 둘은 사진에서도 웃는다.
이 꽃이 무엇이길래 우리 얼굴을 확 바꾸는가. 안에서 흘러나오는 기쁨이 온 핏줄을 돌면서 다시 태어나라 하는가. 비록 바위취 내음이 없어 벌과 나비가 오지 않아도, 사람인 우리가 나비가 된 듯 꽃이 된 듯 손으로 스치고 옷자락에 닿고 우리 팔다리를 잡을 적마다, 꽃이 우리 몸에 제 마음을 불어넣는 듯하다. 이 꽃도 사람처럼 옷자락만 스쳐도 ‘인연’이란 말을 쓸까. 나는 이 꽃밭으로 걸음했으며 이 꽃은 우리가 오리라 훤히 아니, 꽃에 앞서 꼭 사람처럼 느낀다. 연보랏빛에 홀릴 만도 하다. 나는 사흘 동안 왜 꽃을 쫓아다녔을까. 숲에서 만나도 될 텐데, 그 꽃밭을 찾아가야만 그 꽃을 보는 일처럼 무엇이든 때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일까. 어제는 해바라기 뒷모습을 생각하고, 오늘은 밍밍한 꽃을 생각한다.
2022.10. 02. 숲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