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삶 37] 은행나무가 들려주다

2022.10.05 20:21:41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은삶 37] 은행나무가 들려주다

 

은행나무가 사람을 만났기에 씨앗을 잇는다. 알알이 품은 냄새를 짙게 뿜자 달아나는 숨결로 뿌리를 내려가기 힘들다. 하늘로 뻗어야 할 나뭇가지가 누웠다. 한 사람이 품은 억센 넋에 은행나무는 고분고분 가지를 한껏 낮춘다. 사백 살 넘도록 도동서원 앞뜰 한 자리에서 풀꽃을 바라보고 파릇이 돋아나는 풀잎이 햇빛에 바지런히 일하고 열매를 맺고 다시 고요에 들어가는 모습을 헤아릴 수 없이 지켜보았을 테지. 바람결에 속삭이는 은행잎 말을 듣는다.

 

몇 사람이 손에 손을 잡아야 나무가 잡힐 듯 굵고 우람하다. 하늘로 올라가는 몸통은 찢어져서 기워놓았다. 이 은행나무를 보고 글집 나이를 가늠한다. 공자를 섬기는 옛집은 나무를 한 그루 심는단다. 느티나무나 소나무 향나무가 있을 테지만 글집이나 배움집에는 은행나무만 심는단다.

 

김굉필 기림돌을 먼저 둘러본다. 살아서 무엇을 했는지 새긴 글이 있다. 나무판으로 가려놓은 틈으로 들여다본다. 바닥 받침돌에 거북이 머리 둘이 마주본다. 사백 해가 넘도록 거북 부부는 무슨 말을 나누었을까. 등에 짊어진 돌에 한자를 빼곡하게 새겼다. 읽어내지는 못하지만 군데군데 칸이 빈다. 임금이 내려준 글월을 적을 때와 모시는 분 말을 적을 때는 한 칸을 띄웠단다.

 

신라 때는 용머리를 놓고, 조선 때는 거북이를 놓았다고 한다. 도동서원 수월루 앞에는 밑돌이 용이다. 머릿돌에도 용이 두 마리가 앉았다. 용왕한테 아들 아홉이 있었는데 맏이인 비휘는 힘이 너무 세서 등짝에 올려놓기를 좋아해서 밑돌로 쓰고, 둘째 이문은 높은 곳에 올라가 멀리 바라보기를 좋아해서 머릿돌에, 셋째 포뢰는 소리내어 울기를 좋아해서 사찰 범종 머리에. 오래 사는 동물 기운을 빌리는 듯하다.

 

이제 수월루 문 앞에 섰다. 공자가 가르치는 뜻이 동쪽으로 왔다고 동쪽을 높이고 들어가거나 나오거나 동쪽 문으로만 다닌다. 가운데 커다란 문이 굳게 닫혔다. 임금이 와도 그 문으로 지나가지 못한다. 이 문은 높고 낮음이 아니라 문에 그려 놓은 태극처럼 음양이 깃든다.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이 다니는 문이 서로 달랐다.

 

환주문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가파른 곳에 놓은 돌이 거뭇거뭇 이끼가 끼고, 돌이 곰보처럼 닳았다. 문이 자그마하다. 옛사람처럼 갓을 쓰지 않아도 고개를 팍 숙여야만 지날 수 있다. 내 키에도 살짝 숙인다. 발밑에는 연꽃돌이 가운데에 있어 고개를 숙이지 않으면 발이 걸린다. 고개를 숙여 옛사람을 높이지 않고서는 들어가지 못한다. 머리도 숙이고 몸을 낮추고 바닥을 보고 더 몸을 낮추면 깨끗한 첫마음에 다가간다는 뜻일까. 내 마음을 부르는 문이구나.

 

고개를 들면 중정당 바닥돌이 눈에 띈다. 크기가 다르고, 네모난 돌빛이 곱다. 빗물이 스미면 옅은 천을 잇댄 조각보 같다. 도롱뇽이 나왔다. 돌에 앉아 위로 아래로 고개를 까딱인다. 하늘님도 제삿밥 얻어먹으러 가는 날에는 물을 건넌다는데, 하늘님은 물을 아주 무서워한단다. 도롱뇽을 따라 하늘님이 나갔다가 돌아왔으려나.

 

도동서원에서는 기둥이 가장 눈길을 끈다. 둥근 기둥 위쪽에 하얀 창호지가 붙었다. 가운데도 아니고 아래도 아닌 맨 위에 흰 종이를 붙인다. 글집 앞에 흐르는 낙동강으로 다니던 배가 이 흰 띠를 보고 돛을 내렸다가 안 보일 때까지 가다가 돛을 올렸다는 말이 있다. 낮이면 햇빛에 흰종이가 반짝반짝 빛나고, 밤이면 배 불빛으로 붉은빛이 반짝 빛난다는 말도 재밌지만, 이 흰종이가 구름을 뜻한다고 한다. 글집에는 산 사람이 깃들기에 구름이 위이고 구름 밑을 뜻하려고 위에 흰종이가 붙는다. 검은종이가 기둥 밑쪽에 있으면 죽은 신을 그리고 이 마루는 구름 위가 될 테지.

 

옛사람은 하늘과 땅이 서로 껴안은 태극처럼 음양으로 짝을 맺어 하나로 보았다. 모자라는 걸 보태고 채워주는 사랑, 모든 숨결이 나오고 또 나오고 끝이 없듯 이웃을 아끼라는 가르침 같다. 김굉필 님이 죽음 앞에서 보여준 몸짓이 이러할는지 모른다. 제 이름을 알리지 않고, 어버이를 기리려고 했단다. 목이 잘리면 수염도 잘린다고, 어버이한테서 받은 몸을 한 번만 건드리려고 수염을 입에 물고 마지막 숨을 맞았단다.

 

공자가 은행나무 곁에서 사람들을 가르칠 그늘을 마련하려고 심었다는 은행나무, 죽음 끝에 이어지는 숨결이 나무 곁에서 흐른다. 나는 은행나무가 뱉어 놓은 숨을 마시고 마음으로 이 기운을 데려온다. 내가 숨을 뱉어 은행나무로 보낸다. 숨을 쉴 적마다 우리는 만난다. 섞이고 나누는 사랑을 은행나무가 들려준다.

 

2022. 09. 15. 숲하루

 

 

숲하루 글쓴이 jung1568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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