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삶 16] 까기

2022.08.02 15:34:11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은삶 16] 까기

 

내가 없는 사이 유선이가 취나물을 다듬었단다. “큰일 했네” 한마디 해주었더니 “명희가 아가씨인데도 왜 나물을 다듬는지 알겠다”고 한다. 나도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물을 다듬으면 귀찮게 여길지 모르지만 뜻밖에 재밌다.

 

마른 잎을 고른다. 살짝 무른 잎도 고른다. 먹을 수 있는 싱싱한 잎끼리 따로 모아 한 자루 담아 놓으면 뿌듯하다. 나물은 묵어서 다듬을수록 손길이 더 가는데 돈은 덜 받는다. 나물이 제 임자를 찾아가며 제 몫을 다한다고 생각해서 그럴까. 팔아도 얼마 안 되지만 누가 사가면 즐겁다.

 

죽음 끝에 살아난 나물이기에 다듬는 손길은 숨결을 다스린다. 비닐에 담아 놓은 청경채가 물방울이 차서 끝이 무르고 누렇게 떴다. 유선이는 자루를 뜯어 청경채를 한곳에 모으고, 나는 잎을 다듬고 그릇에 담는다. 네 그릇이 나와서 칸에 둘 수 있다. 이제 로메인이란 나물을 다듬는다. 자루마다 하나씩 물렀다. 로메인이 비를 맞았는지 뚝뚝 꺾인다. 처음 왔을 적부터 이러더니 까맣게 무른다. 유선이는 자루를 뜯어 한곳에 모으고 나는 골라서 새 자루에 넣는다. 둘을 다듬고 나니 개운하다.

 

시골서 갖고 온 옥수수를 까야 하는데 무겁다. 유선이와 둘이서 들어 옮긴다. 빈 상자를 바닥에 놓고 껍질을 담는다. 밭에서 막 딸 적에는 푸릇푸릇 싱싱했는데 이틀 지나니 바람이 안 든 탓인지 껍질이 까맣다. 껍질이 말라서 돌돌 말리며 하나씩 떨어졌다. 지저분한 껍질을 떼고 까맣게 마른 수염 가루가 떨어지지 않게 훑는다. 유선이는 이제 바닥에 쪼그려 앉아서 깐다. 손힘이 무척 든다. 손가락이 욱신거린다.

 

옥수수 껍질이 봉긋하게 쌓인다. 껍질을 상자에 차곡차곡 담으며 손이 아프다고 투덜거릴 적에 전기를 만지는 사람이 왔다. 다달이 와서 둘러보고 종이에다 써주고 가는데, 내 옆에 오더니 “시골서 갖고 왔나 보죠?” 하고 묻는다. “껍질을 까면 안 사갈 낀데, 내가 사갈까” 하더니 어디서 갖고 왔는지 상자를 들고 온다. “몇 개에 얼만교?”, “다섯 개 삼천 원인가.” “그래요.” “여섯 개씩 짝맞추어 담아 볼게요.” 세 벌을 담았다. 사장이 곁에 오더니 더 넣어 주라고 한다. 열다섯에 만 원 할 걸을 서른 개를 넣었다. 손마디가 아프고 손목이 아팠는데 옥수수가 확 주니 힘이 난다.

 

껍질이 상자에 넘친다. 바닥이며 곳곳에 떨어지고 어설프기 그지없다. 좁은 길로 들고 가자니 이리저리 받친다. 가게 사장한테 좀 들어 달라고 했지만, 다른 일을 챙긴다고 바쁘다고 한다.

 

손길이 많이 가는 일을 할 적에, 또 이렇게 손힘을 많이 들여서 까는 일거리를 보면서도, 저 혼자 바쁘다는 말씨로 기운을 툭툭 빼고서 가버리면 속이 쓰리다. 시름시름 죽어가던 나물을 다듬던 마음을 생각한다. 남을 탓하지 말자. “유선아, 이거 들자” 둘이서 까 놓은 옥수수를 앞으로 옮긴다.

 

나물은 까면 속이 드러나도 싱싱한데 말은 까면 속이 뒤집어질까. 숲을 다니며 책을 읽으며 잔뜩 마음을 다스려도 일이 힘들 때면 훅 튀어나오는 말이 날카롭다. 혀는 입안에 있는데. 입은 제멋대로 노는 혀를 어떻게 바라볼까.

 

2022. 08. 01. 숲하루

숲하루 글쓴이 jung15688@naver.com
Copyright @배달겨레소리 Corp. All rights reserved.

경북 상주시 화북면 입석5길 189-8 등록번호: 경북, 아00595 | 펴낸날 : 2020.6.8 | 펴낸이 : 최석진 | 엮는이 : 박연옥 | 전화번호 : 010-3174-9820 Copyright @배달겨레소리 Corp.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