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은삶 3] 나무 안아 보기
또 앞산에 가자고 한다. 나는 가보지 않은 숲으로 가고 싶은데 선뜻 간다는 말이 안 나온다. 밤이 깊었으니 갈지 안 갈지는 일어나서 어쩌기로 했다. 곁님은 멧골로 가고 나는 몽돌이 있는 바닷가로 떠날까. 살짝 생각하다가 따라나선다. 앞산은 몇 걸음 갔지만 골골이 다니지 않았으니 가자, 숲에 가면 답답한 마음이 풀어질지도, 아니야 숲 그대로 보자. 그렇지만 나무를 꼭 안아 봐야지, 혼자 흥얼거렸다.
비가 부슬부슬 내린다. 비옷을 챙겨 왔으나 우산을 쓴다. 가방이 젖지 않게 덮개를 씌우고 모자를 쓴다. 비가 가늘어 흙길에 먼지만 가라앉았다. 길이 넓고 땅이 질퍽하지도 마르지도 않아 걷기가 좋다. 한 발 두 발 딛자 가랑이에 흙이 달라붙는다. 발목 토시를 찼다.
가랑비에 옷이 젖는다는 말처럼 토시와 모자가 축축하다. 잎이 우거진 나무 밑으로 지나면서 나는 우산을 접는다. 비옷을 입으면 덥고 우산을 쓰고 걷기에는 팔이 아프다. 이쯤 내리는 비는 맞아도 좋으리. 쉼터 하나 지나고 몸이 선뜻하니 커피를 마신다. 오르기도 앞서 꾸물꾸물하며 오른다. 커피 한 잔 마시기까지는 몸풀기인데 나는 이렇게 슬슬 놀며 오른다. 꽃구경 나무 구경 혼자 바쁘다.
가랑비가 온다고 비바람이 불었을까. 참나무 잎이 꺾였다. 벌써 벌레집을 지으려나. 집어서 살피니 작은 빗방울이 이파리에 빽빽하게 앉았다. 여리게 내린 가랑비에 말랐던 잎이 찰싹 붙었다. 잎은 빗방울이 얼마나 반가울까. 빗방울은 이파리를 적셔 주어서 얼마나 기쁠까. 휘어진 이파리에 맺힌 빗방울이 떨어지지 않으려는 눈치다. 저 풀잎도 생각이 있고 작은 빗방울도 생각이 깊은가. 하늘이 알아서 비를 보내고 비는 알아서 풀잎을 어루만지는구나. 바싹 타들어 가고 시들한 잎에 뿌려준 비가 참으로 고맙다고 생각했다.
내 손등처럼 울퉁불퉁 흙을 뚫고 올라온 나무뿌리를 퐁당퐁당 건너뛰며 걷는다. 유월 숲이 갓 잎을 틔운 사월 풀빛하고 다르다. 도드라진다. 바위틈에 자란 풀에 솔잎이 떨어져 저들끼리 똘똘 뭉쳐 풀을 잡는다. 이렇게 잎이 작은 풀포기를 살리고 흙이 되고 터를 잡도록 돕네. 이 마른 솔가리도 생각이 있구나. 바람이 등을 떠밀어 보람차게 살도록 도왔을 테지. 이 어여쁜 소나무를 꼭 안아 주었다. 내가 안아 주었으니 더 잘 자랄지 모른다.
오르면 오를수록 잎과 빗방울이 떨어지지 않으려고 꽉 잡고 안간힘을 다해 대롱대롱 달렸다고 느낀다. 한참 비가 오지 않아 어떤 나무는 잎이 거의 말라가고 싸리꽃도 한창 피어야 할 적에 피지 못하고 시들하다. 이 한 방울 비를 만나려고 얼마나 많은 날을 목말랐을까.
차츰 싸리꽃이 모듬으로 피었다. 어린 날 마당을 쓸던 빗자루만큼 자랐다. 나는 가까이 가서 보랏빛 꽃을 손바닥에 올렸다. 나뭇잎도 쓰다듬었다. 잎을 하나 따서 먹어 보니 아주 쓰다. 비가 올 때까지 온힘으로 버틴 삶을 잎에 고스란히 스며놓았네. 어린 날에 싸리나무를 다듬어 바구니를 짤 때 할아버지 곁에서 돕다가 부러진 싸리나무에 손바닥이 찔린 적이 있다. 휘청이며 잘 부러지지 않고 부러진 나무는 결결이 겹친다. 비가 안 올 때를 버티려면 속은 따로따로 버티고 하나로 뭉치는 듯하다. 싸리꽃 이파리에 내 숨결을 나누고 손에 닿는 잎마다 손바닥으로 쓰다듬어 주었더니 좋다고 잎을 흔든다. 빗방울이 우두둑 떨어진다.
이제는 너머로 내려온다. 여느 때 같으면 올라간 길로 다시 내려오지만 그대로 넘어간다. 잣나무밭이 나왔다. 서른 해 앞서 큰불이 나고 잣나무를 심어 놨단다. 듬성듬성 난 나무와 나무 사이에 긴걸상을 듬성듬성 놓았다. 잣나무 그늘에 누워 쉬는 자리는 향긋한 잣잎에 머리가 맑을 듯하다. 커다란 잣나무를 만났다. 두 사람이 세 팔로 안아야 잡힐 듯하다. 나는 아까처럼 이 나무에 오른다리를 감고 또 꼭 안아 주었다. 그리고 ‘이 숲을 지켜 주어서 의젓하다’ 하고 말한 다음 토닥토닥 해주었다.
다리를 풀고 내려오는데 길 한가운데서 줄무늬 다람쥐와 마주친다. 힐끗 본 다람쥐가 뱀인 줄 알고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다람쥐도 나만큼 놀랐는지 그대로 멈추었다가 포르르 저리로 간다. ‘다람쥐야, 걱정 마, 놀라지 말아’ 나는 또 한마디 했다. 내 말을 들었는지 다람쥐는 자리를 살짝 옮겨간다. 참 빠르다. 숲에 온 사람을 자주 보았겠지. 조금만 느긋하게 갔으면, 아니, 다람쥐 두 손이라도 함 보았으면, 세운 꼬리도 만져 보았으면 생각했다.
2022. 06. 23. 숲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