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숲하루 풀꽃나무 이야기 110]지렁이
지렁이가 비렁길에 떼로 말라죽었다. 어림잡아 몇 백 마리는 될 듯하다. 비도 내리지 않는데 어디서 몸을 숨기다가 흙도 없는 울퉁불퉁한 비렁길로 나왔을까. 여름 햇볕이 가장 뜨거울 낮에 어디를 가려던 길일까. 나는 지렁이를 밟지 않으려고 요리조리 비껴갔다. 열 살 적에 지렁이를 토막낸 적이 있다. 비가 쌀쌀하게 내렸다. 처마 밑에 웅크리고 비를 구경하는데 지렁이 한 마리가 앞에 지나갔다. 곧게 몸을 뻗고 오그리며 앞으로 나아간다. 좁고 느리게 간다. 보드라운 살결이지만 만지기 싫어 목을 움츠렸다. 아궁이 나뭇가지로 살짝 건드렸다. 내가 건드려도 가던 길 가고 앞을 막아도 머리를 틀어 기어간다. 이러다가 지렁이 허리를 끊었다. 잘린 몸이 꿈틀했다. 피도 나지 않고 한 마리던 지렁이가 두 마리가 되었다. 마디마디 주름이 지고 마디가 끊겨도 죽지 않았다. 비렁길에 흩어진 지렁이는 밟혀서 죽지 않았다. 어린 날 내가 본 지렁이와 빛깔도 달랐다. 먹는 흙에 따라 몸빛이 다른가. 속이 훤히 보이는 여린 맨몸으로 어떻게 땅에서 버틸까. 제가 지나가는 흙이 제 몸처럼 부드럽다는 몸짓일까. 흙을 숨 고르고 비 오면 제 숨을 고르려다 사달이 난 걸까. 비가 올 줄 어떻게 알아차릴까. 아니면 땅이 흔들리는 줄 느낄까. 지렁이가 날씨를 잘못 읽었을까. 태어나 이렇게 많은 지렁이를 처음 보았다. 마디가 끊어져도 또 생기지만 몸이 마르면 꼼짝 못하네. 발이 있으면 살았을까.
2022. 02. 25. 숲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