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달겨레소리 한실 글님 ]
울산고을 우리말 땅이름 살펴보기
2. 보안 새터에서 못앞(천전) 가는 길
어머니가 나서 자란 곳은 한실 마을이고 열일곱살 때 못앞(한실에서 한실내를 거슬러 시오리쯤 떨어진 마을)으로 옮겨와 살다가 열아홉에 가마 타고 보안 새터로 시집오셨으니, 엄마집(외가) 가는 길은 새터마을에서 못앞마을까지 걸어가는 길이었다.
누구나 다 그랬겠지만, 옛날엔 따로 나들이(여행)가 없고 동네 속에서 뱅뱅거리며 지내다 엄마집(외가) 가는 나들이는 언제나 꿈길이다. 어쩌다 지나가는 버스를 타고 걸음을 줄일 때도 있었지만, 어머니 따라 온 길을 걸어가기가 일쑤였다.
집을 나서면 먼저 당만디 고개를 넘어야 하는데 오르막길 얼추 가운데쯤에 가웃방구(반방구)가 있고, 거기쯤 지날 때 엄마가 “반방구네!” 하시면 고개까지 가웃 넘게 왔으니 힘내라는 말로 들렸다. 당만디 고갯길은 꽤 가파른 길이어서 아이들에겐 오르기가 제법 힘들었다.
가웃방구를 지나 한참 더 올라가면 가파르던 길이 좀 눅어지면서 덜 가파른 길로 바뀌어 당만디 고개까지 이어져 한결 쉽게 갈 수 있고 그 어름에 있는 중산골을 지나면 진풀밭이 나오고 그러면 곧 당만디 고개에 이른다.
당만디 고개는 네 철 내내 바람이 잘 부는 곳으로 여름철 한더위에도 당만디 고개에만 오르면 시원한 바람이 쉬지 않고 불어와 사람들을 즐겁게 해 주는 곳이다.
이곳으로 소 먹이러 오면 당만디 재 둘레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무덤가에서 씨름도 하고 여러가지 놀이를 때가는 줄 모르고 하다가 해질녘에 소를 몰고 집으로 온다.
고개를 넘어 한참을 내려가면 웃마넉골이 나오고 아미메 기슭을 지나 돈골(전읍- 신라 때 돈을 만들던 곳, 은돈을 만들었다고 은골이라고도 불렀다함)로 들어가는데, 왼쪽이 달비태(월부) 마을이고 오른쪽 등성이 너머에는 수정내 마을이 있다.
한길(신작로)로 나오면 기와 굽던 마을, 새계(옛날에 새계라는 절이 있었다 함)와 마주치고 길 따라 오르막을 오르면 서빠골(또는 섶밭골) 마을이다. 이곳에는 이 둘레에 하나뿐인 두광갑배곳(중학교)이 있다.
또 다른 길은 웃마넉골에서 아랫마넉골로 들판길을 따라 한길까지 곧장 내려가는 길이다. 여기서 멧모랑지를 지나면 서빠골까지는 쪽 곧은 길인데 버드나무 길나무(가로수)가 길 두쪽으로 빼곡히 높이 자라있어 서빠골이 아득히 멀어 보이곤 했다.
서빠골을 지나 너부(인보)쪽으로 오면 왼쪽(두동)으로 갈라지는 세거리길이 나오는데, 이곳 어귀를 옛날엔 이리구찌(입구를 가리키는 일본말)라 불렀다. 이제라도 ‘입구’를 ‘어귀’로 바꿔 부르면 좋겠다. 요즘은 이곳 바로 곁에 큰 두레방앗간(농협정미소)이 있다
너부는 꽤 큰 마을이다. 솔고을(면)일 보는곳, 깨살핌이집(파출소), 여름지이두레(농협)가 있고, 옛날엔 저자도 서던 곳이다. 멀리 밝메(백운산) 자락에서 윗신필, 아랫신필을 지나 흘러내리는 물은 신필 큰못에 모였다가 너른 너부들에 물을 대어준다. 신필못은 너부들을 다 적시고도 남을 만큼 물이 넉넉하여 옛날처럼 물싸움할 일이 없어졌다고 한다.
너부를 지나면 하늬녘(서쪽)에 내가 있다 하여 이름붙은 하늬내(서하)는 대정마을, 구셋골, 방말(밤나무가 많아 밤말 →방말)로 이뤄지는데, 이곳을 지나면 바로 배고개다.
배고개는 옛날에는 온사람(백몀)이 모여야 넘을 수 있었다고 해서 배고개라 하였다 하는데 참말인지 모르겠다. 배고개 말밑(어원)은 더 밝혀져야 하리라 본다.
구불구불 배고개를 한참 넘으면 신대이(구량리)가 나오고 신대이에서 왼쪽(새녘)으로 내려가면 못앞(천전)으로 들어가고 오른쪽 고헌메 쪽으로 내 따라 올라가면 저절기림몬(천연기념물)인 닷온해(오백년) 묵은 은행나무가 있는 중이마을이 나오고 더 올라가면 찻골마을(차리)이다.
못앞은 야트막한 언덕배기 아래에 자리잡은 포실한 마을인데 언덕배기 위쪽으론 큰못과 너른 들이 펄쳐져 여름지이(농사)가 잘 되는 기름진 땅이 자리 잡았고 마을 앞으로는 내가 흘러 온갖 물고기가 많았고, 물길 따라 장치, 반구대로 이어지는 곳곳에는 아이들 저절 놀이터가 널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