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내가 사랑하는 아이] 33. 돌보기
시골에 살던 둘째 아이가 네 살이 되어 집에 왔다. 두 딸이 어린이집에 함께 간다. 아침에 조금 일찍 나서서 어린이집에 데려다주는데, 둘째 아이가 자꾸 운다. 안 들어가겠다고 울어 언니가 손잡고 가자고 말해도 들어가지 않으려고 한다. 이 층 문 앞에서 샘님이 안고 달래도 숨죽여 운다. 샘님이 가라고 손짓해서 내려오는데 우는 소리에 발걸음이 무거웠다.
이백 미터 떨어진 곳에 아빠 일터가 있고 삼 층이 우리 집이다. 아빠가 여섯 시에 데리러 못 가면 언니가 동생 손을 잡고 데리고 온다. 차가 안 다니는 바로 이어진 골목길을 일러 주었다.
골목 모퉁이를 돌아 오십 미터 길인 우리 집으로 오는 사이에는 찻길이 있어 가게가 들어선 쪽으로 바짝 붙어서 온다. 전봇대가 있고 비스듬한 하수구가 지나가는 길로 걷는다. 일곱 살 첫째 아이는 걸음이 늦은 동생을 어깨동무하고 허리를 굽혀 동생 눈높이에 맞추고 살살 데리고 온다. 하수구를 덮은 넓적한 돌에 구멍이 둘씩 있어 어른인 나도 가끔 발이 걸러 엎어질 뻔한 적이 있는데, 동생이 빠지지 않게 비껴 오느라 신발 앞머리가 구멍에 걸러 엎어졌다. 동생 손을 잡고 있어 엎어지면서 오른쪽 볼을 많이 갈았다. 많이 아플 텐데 울지 않는다. 동생을 집까지 잘 데리고 와야 하니 울 틈이 없고 동생 보는 앞에서 넘어져서 아파도 꾹 참고 티를 내지 않았다. 집에 온 첫째 아이가 울음을 터트린다. 살갗이 꽤 벗겨져서 약을 발라주었다. 딱지가 떨어지기까지 여러 날 걸렸다.
해가 바뀌어 첫째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학교에 가니 마치는 때가 동생하고 달랐다. 동생을 데리러 가라고 시키기에는 벅찼다. 학교 마치고 아무도 없는 집에서 혼자 숙제 준비를 못 하고 새참도 먹이고 손길을 주어야 해서 내가 일을 그만두려고 망설였다. 마침 복지관에 두 딸을 돌봐줄 사람을 여쭈었다. 먼저 하겠다고 나선 사람은 내 일터하고 먼 쪽인데 우리 애들을 그쪽 집으로 데려다주란다. 번거롭기만 해서 다른 사람을 여쭌다. 돌봄길(보모교육)을 따로 받은 사람이 왔다. 첫 느낌도 좋았다. 나는 그분을 언니라 부르고 두 딸은 이모라 부른다.
이모가 없는 우리 딸들은 이모가 집에 먼저 와서 기다려 주니 무척 좋아했다. 이모는 서울에서 살다가 살림이 잘 안 풀려서 안동에 오고 아저씨는 일자리를 한창 찾는데 우리 집에 와서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싫어했다. 그래도 이모는 선뜻 일을 맡아 준다. 큰딸이 학교 마치는 때에 맞추어 우리 집에 와서 숙제를 봐주고 준비물하고 샛밥을 챙겨 준다. 네 시가 넘어 작은딸이 마칠 즈음에 이모가 데리고 오고 두 아이 저녁까지 잘 챙겨 주었다.
하루는 동생이 열이 나고 아팠다. 주사를 맞기 싫어서 이모한테 안 맞는다고 조르자 이모는 나한테 전화한다. 의사를 보고 약만 지어서 우리 집이 아닌 이모 집으로 갔다. 병원 옆에 이모 집이 있어 두 딸이 놀다가 집에 왔는데 밤새도록 온몸이 높다. 첫째 아이는 바가지에 물을 떠서 마른 손수건을 적셔서 동생 이마에 얹는다. 손수건이 미지근해지면 또 물에 적셔서 얹었다.
이튿날 동생이 가라앉아서 둘이서 학교놀이를 하며 논다. 첫째 아이는 가르치는 몫이고 동생은 배우는 몫이다. 놀다가 동생이 찡찡거린다. 언니는 동생을 겨우 달랜다. 그 모습을 보며 웃음이 났다. 찡찡대면 듣기 싫어하는 아이인데 동생한테 찡찡대지 말라고 하면서, 첫째 아이 스스로 하고 싶은 말을 꾹 참더라.
이제 첫째 아이가 열 살이 되었다. 작은딸이 일곱 살이 되어 영어를 배우러 가는데 언니가 따라간다. 교실에 같이 들어가서 동생이 처음 영어를 배우는 모습을 보려고 따라갔는데 어떤 아저씨가 들어가지 못하게 했단다. 두 시간 동안 밖에 서서 동생이 배우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동생이 목소리가 작아서 그런지 고요히 있어. 난 기다리느라 따분했어. 다음부터는 안 따라갈래.”
며칠 뒤 또 동생이 갑자기 아프다. 얼굴이 벌겋고 몸이 뜨겁다. 언니가 약 상자에서 온도계를 꺼내 겨드랑이에 끼운다.
“엄마 37도가 넘으면 사람이 넘어간다고 학교 선생님이 말해 줬어. 병원에 데리고 가자.”
말을 끝내고 동생이 옷을 얇게 입어서 감기 걸렸다고 동생 옷을 여미어 주더라.
또 하루는 학교에서 영어 배우는 날인데 언니가 3.4학년 반을 못 찾는다. 운동장에 뛰어놀던 동생을 데리고 갔다. 언니가 학년 표시가 잘 안 보여서 망설이고 있을 적에 동생이 뒷걸음으로 물러나서 보니 잘 보이더란다.
“동생이 따라와서 더 빨리 찾았어. 내가 첫째로 왔어.”
언니는 아주 좋아했다. 방학이라서 동생을 집에 혼자 두지 못해 데리고 학교 운동장에서 놀다가 언니가 영어를 배울 적에 뒷자리에서 듣고 마치면 같이 왔다. 언니는 동생이 뒤에서 기다리니깐 재미있단다.
“나 내일 또 동생하고 학교에 같이 갈래.”
우리가 맞벌이를 하여 두 딸이 세 해를 떨어져 살았다. 둘 사이에 마음이 없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함께 지내니 동생은 언니 말을 잘 따르고 언니는 동생이 다치지 않게 잘 돌보았다. 아이들은 마음으로 서로 아는구나 싶다. 세 해나 떨어져야 했지만 얼핏얼핏 느꼈을 테지. 세 해 만에 한집에서 살아가면서 ‘마음으로 느끼던 사이’를 짙게 깨닫고서 서로 돌보고 아끼는 하루가 되었구나 싶다. 이동안 나나 곁님은 바깥일로 바빴지만, 두 아이를 돌봐준 이모가 있어서 고맙다. 그분한테서 따스한 손길을 배웠으리라. 어느덧 스물일곱 살이 된 둘째 아이는 틀림없이 마음 깊이 언니 손길을 느끼고 알리라 본다.
2021. 4. 28. 숲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