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내가 사랑하는 아이] 32. 시골아이
“옷 산다고 하디 샀나?”
“아니. 아직 안 샀어.”
“꽃샘추위 지나가면 봄을 건너뛰고 바로 여름이 오지 싶다. 짧은 철이라도 옷은 제때 바꿔 입어야지.”
“응 쉬는 날에 나가 볼게.”
“그래라. 니 동생 집에 왔다.”
“알아. 어제 말했어.”
“아. 어여, 엄마가 옷값 보태 주까?”
“응, 얼마나?”
“돈은 없어. 10이나 20?”
“돈 없음 안 줘도 돼.”
“어디로 보낼까?”
“농협으로. 외우는 게 이뿐이야.”
“응. 그날 입고 온 겉옷이 하도 낡아서 사주는 거야! 불쌍해 보여.”
“다들 왜 그러지. 난 아무렇지 않은데. 오예 받았슴다. 고맙습니당.”
“옷 사면 찍어서 보내.”
“네, 네, 그렇게 남기겠슴다. 그럼. 쉬십셔. 난 머리가 너무 아파서 일찍 잘랭. 요즘 한쪽 머리가 너무 아파.”
“그래. 푹 자. 잘 때는 잠만 자”
“잠을 깊이 못 자. 새벽에 자꾸 깨서 머리가 더 아픈 듯. 쭉 자야 하는데. 어제는 한 시간마다 깼어. 미치는 줄 알았어.”
“뒷산이라도 가서 숲 보면 나은데.”
“음. 내일은 시장에 나가서 돌아다녀 볼게.”
“너 어릴 적에 시골에서 지내서 몸이 서울을 밀어내잖아.”
“근데 고단해도 잠 못 자. 맞아. 서울 오고 힘들어. 성남에 살 때가 더 나았어.”
“시골 마음 자꾸 느껴라.”
“아니다. 그때도 힘들긴 했다. 일을 많이 해서. 알겠어. 암튼 오늘은 자보겠슈.”
설날 집에 온 첫째 아이가 집에 가려고 옷을 입는데 겉옷에 보풀이 덩어리로 뭉쳤다. 보풀은 밀고 밀어도 떨어지지 않는다. 가위로 하나씩 싹둑 자를 만큼 크다. 허리끈도 터실터실하다. 손가방을 메느라 서로 부딪친 자리에 더 뭉쳤다. 버스역에 두 딸을 태워 주고 가는 뒷모습을 보니, 첫째 아이가 왜 그리도 눈에 밟히는지 나도 모르게 뭉클했다. 어린 날 시골에 살 적에 딸을 두고 올 적에 느끼던 그 마음이 들었다.
첫째 아이는 태어나 스물여덟 달을 시골에서 보냈다. 대문 없는 고샅길을 들어서면 계단을 오르지 못하는 할머니만 쓰는 뒷간 옆에는 두엄을 모은다. 먹다 남은 밥찌꺼기도 버린다. 둘레에는 어린나무에서 벚꽃이 피었다. 골목으로 차를 꺾으며 멀리서 우리 딸을 보았다. 꽃은 피지만 시골 바람은 찼다. 두툼한 빨간 바지에 분홍빛 옷에 감물이 묻은 웃옷을 입고 까만 신발을 꺾어 신고 골목을 내려와 옆집 마당으로 들어간다. 나는 길에 차를 세우고 조용히 내렸다. 뭐하나 싶어 살금살금 몸을 구부려 긴 골목 풀숲에 숨어서 무너진 옆집 담벼락 끝 매실나무 뒤에 쪼그리고 앉아서 엿본다.
등겨를 담은 쇠바가지 손잡이를 한 손으로 꼭 잡고 다른 손바닥을 펼쳐 밑둥을 잡았다. 가슴팍에 감싸안고 까만 덮개를 덧씌운 닭우리에 들어간다. 골이 진 양철 지붕을 길게 접은 모이통 앞에 서서 쏟아붓는다. 그런데 등겨는 모이통이 아닌 바닥에 깔아 놓은 왕겨에 떨어진다.
여느 때는 증조할머니가 등겨를 모이통에 붓는데, 우리 딸이 그대로 따라 하지만 엉뚱한 곳에 쏟는다. 닭장 귀퉁이에 닭이 옹기종기 모여서 우리 딸이 하는 짓을 멀뚱히 바라본다. 우리 딸은 닭이 저를 빤히 보는 줄도 모르고 쇠바가지에 남은 등겨를 남김없이 턴다.
다 비운 쇠바가지를 가슴에 껴안고 나온다. 부스스한 머리는 머리띠로 눌려도 삐죽삐죽 튀어 올라왔다. 돌부리에 넘어지지 않으려고 입을 야무지게 모으고 잰걸음으로 가만히 내려오는데 몰골이 시골아이가 다 되었다.
하루는 마당에 돌이 박혀서 잘 걷지 못해 흙바닥에 퍼질러 앉을 적에 마침 내가 갔다. 기저귀를 두툼하게 차고 뒤뚱거리다가 또 주저앉는다. 앞에는 강아지가 우리 딸한테 가까이 오려고 꼬리를 흔들며 목줄에 당긴 몸을 쑥 내밀었다. 개하고 우리 딸이 서로 마주 본다. 나는 개한테 물린 적이 있어 개만 보면 소리부터 지르고 소름이 살짝 돋고 무섭다만, 줄에 묶여서 더 가까이 오지 못하는 강아지까지 무섭지는 않다. 강아지가 우리 딸한테 매달리듯 몸을 내민다. 이날도 골목에서 흙바닥에 퍼질러앉은 딸을 보니 마음이 싱숭생숭하더라.
할머니가 저를 떼놓고 뒷밭에 가면 혼자 찾아갈 만큼 걸을 수 있자 길바닥이 놀이터가 되었다. 집 뒤로 낮은 언덕을 오미터쯤 오솔길을 오르면 비닐집도 나오고 고추밭이 옆에 있어 일하는 할머니를 보고 내려오는 오솔길이 반질반질하다. 나는 쉬는 날 집에 오자마자 방에 우리 딸이 없으면 뒷밭으로 뛰어갔다. 집에서 어림잡아 자른 머리가 어찌나 제멋대로이다. 목에 손수건 두르고 실로폰 들고 볼을 발갛게 해서 할머니를 찾아간다.
할아버지가 경운기를 뒷집으로 몰고 와서 풀밭에 세우고 탕탕탕 약을 치면 우리 딸은 노란 약줄을 따라 비틀거리며 오솔길을 뛰면서 집에 왔다가 증조할머니 보고 다시 뒷밭에 할머니 할아버지 보러 오갔다. 날마다 닭하고 개 오리 고양이 그리고 뒷밭을 오고 가며 할머니한테 재미난 이야기를 듣는 일이 딸이 보는 나라였다.
나는 딸을 데리고 나오는 날에는 새도 보여주고 놀이기구도 태워 준다. 새우리 앞에 쪼그리고 앉아 가만히 보거나 학교 운동장에서 아무개를 만나면 개를 졸졸 따라다녔다. 우리 엄마 집에 데리고 가면 마구간 소한테 간다. 할머니 집에서 혼자 소를 보러 간다. 추운 겨울에 가마솥을 걸어 둔 부뚜막이나 아궁이에 고양이가 튀어나와도 우리 딸은 거리끼지 않았다.
집짐승이 우리 딸 동무이고 집짐승도 우리 딸을 동무로 여기며 지냈다. 이제 뛰어다니자 마을에 또래 사내아이가 왔다. 찻길 건너쪽에 집이 있어 우리 딸은 우진이를 본 뒤부터 할머니를 졸라 걔들 집에 가서 놀았다.
어린 날 시골에서 집짐승하고 놀고 풀밭에 뛰어다니고 흙을 밟던 몸이 학교에 갇힌 뒤로는 차츰 멀어지고 이제는 일터에 꼭꼭 갇힌다. 숲을 가까이할 틈조차 없는 빠듯한 서울 삶에 걸핏하면 목이 아프네, 머리가 아프네. 시골에서 자란 탓인지 겉멋을 부리지는 않네. 옷차림이 늘 가볍던데 보기좋은 옷을 입으면 마음도 말씨도 입은 옷에 따라 나근나근한 몸짓이 될까. 예쁜 옷 입고 나들이하며 어서어서 짝을 찾고 보풀이 일어난 옷은 그만 입으면 좋겠다.
2021.4.19. 숲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