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내가 사랑하는 아이] 29. 돌잔치
할머니가 첫째 아이를 돌보는 동안 어머니하고 우리 엄마하고 셋이서 밥을 지었다. 미리 썰어 놓은 고기에 참기름을 붓고 볶다가 불려 놓은 미역을 넣어 덖은 다음 물을 붓고 들깨가루를 넣고 끓였다. 하룻밤 양념에 절여 놓은 고기는 엄마가 볶고 나는 옆에서 양파 당근 돼지고기를 볶아내고 시금치를 삶아 소금을 뿌려 간을 맞추고 볶은 밑감을 한 그릇에 모았다. 당면을 삶아 불판에 담고 참기름을 두르고 간장을 섞어 볶은 당면을 골고루 버무린다. 엄마는 가자미는 손질하고 졸인다. 엄마는 양념이나 그릇이 어디에 있는지 몰랐다. 그래도 엄마가 내가 할 부엌 일을 맡아 주었다.
우리가 부엌에서 밥을 짓는 동안 어머니는 마루에서 돌자리를 차렸다. 미리 사다 놓은 보따리에서 과일을 꺼내어 펼친다. 마루가 꽉 찬다. 수박 하나 바나나 한 다발 포도 한 접시 능금 한 접시를 담았다. 하얀 떡을 담고 송편 수꾸떡 인절미도 담고 고기꼬지도 올렸다. 돌자리가 푸짐하다.
어머니는 연필하고 공책하고 실을 올렸다. 만 원짜리 종이돈도 하나 올리고 나는 우리 딸 주려고 사온 장난감 청진기를 상에 올려둔다. 이제 우리 딸한테 입힐 돌빔을 찾는다. 어머님이 우리 딸보다 세 살 많은 외손주를 키우다가 우리 딸을 키운다고 돌려보냈다. 그 아이가 입던 돌빔을 보자기에 싸서 다락에 두었다. 이제 우리 딸이 첫돌이 되어 입는다. 빨간빛에 파랑 노랑 꽃분홍 풀빛이 깃들고 앞쪽하고 어깨에는 둥근 그림이 있다. 입혀 놓으니 오랜 옷이다. 나는 첫돌에 입히려고 저잣거리를 몇 바퀴 돌았다. 오만 원이면 예쁜 돌 돌빔을 사겠던데 꾹 참았다. 어머님은 애 봐줄 적에 한 푼이라도 모으라고 말했다. 하루만 입는 옷이라 어머니 말에 따랐다. 치마가 길어 어깨끈을 접어 실로 바쁘게 꿰맸다.
옷을 입히고 머리를 묶었다. 머리칼이 부드럽고 미끄러워서 고무줄이 자꾸 빠진다. 삐죽삐죽한 머리가 어설프게 섰다. 머리핀도 없어 그냥 둔다. 돌빔을 입혀 주니 문턱을 넘고 마루에 나온다. 어머님은 우리 딸이 돌자리에서 혼자 있는 사진 찍는다고 딸 뒤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가만히 웅크린다. 할머니가 곁에 있어야 울지 않고 마루에 놓인 어설픈 짐도 가린단다. 할머니가 자리에 올려둔 물건을 하나 잡으라는 말을 듣고 딸은 하나하나 본다. 나는 속으로 처음 보는 청진기에 눈길이 가기를 바랐다. 그런데 연필을 잡는다. 딸은 엄마를 보지도 않고 잡은 연필을 할머니한테 주었다.
손님방에는 마을 할머니들이 기다리고 있다. 일직댁, 삼성댁, 새터댁, 고창댁, 가일댁, 심풍댁, 함창댁, 지당댁, 풍기댁이 왔다. 우리 할머니는 남홍댁이라 부르고 어머니는 갈밭댁이라 부른다. 누구 집에 제사나 태어난 날이면 모인다. 돌잔치에 온 할머니들은 우리 딸을 보러 자주 놀러왔다. 어머니가 밭에 가면 할머니가 우리 딸하고 놀아 주느라 집 밖을 한동안 못 나갔다. 우리 딸이 걸음마를 하는데 돌길에 넘어지기라도 하면 할머니는 힘이 없어 얼른 일으켜세우기 힘들다. 팔하고 허리를 다쳐 걸음도 느리다. 그래서 가깝게 지내는 이웃 할머니는 집에 왔다. 이제 우리 딸이 첫돌이라고 아침에 곁님이 할머니들 집을 찾아가서 불렸다.
아홉 할머니가 옹기종기 앉았다. 큰자리를 펼치고 작은 자리 하나를 덧붙였다. 엄마가 부엌에서 밥을 뜨고 국을 뜨면 나는 들고 나른다. 아버님은 어른이라고 여자들 있는 곳에 나오지 않고 안방에서 우리 딸을 돌본다. 할머니들하고서 밥을 먹던 어머니가 일어나더니 마루로 간다. 밥을 담아내던 커다란 은빛 둥근 그릇을 들고 왔다. 그리고는 할머니들 밥자리에다 들고 선다. 나는 깜짝 놀랐다.
“자, 돌값 내놓으시오.”
“어머님 그러지 말아요.”
작은 소리로 어머니한테 말했다. 어머니는 걱정 말라고 웃는다. 밥을 먹던 할머니들은 숟가락을 놓고 돈을 꺼낸다. 치마를 걷어 올려 속바지 주머니에서 꺼내고 알록달록한 복주머니에서 꼬깃꼬깃 접은 돈을 꺼내서 놓는다. 이천 원 내는 할머니도 있고 삼천 원 내는 할머니도 있고 오천 원 내는 할머니도 있다. 우리 할머니 남홍댁은 만 원을 낸다. 어머니도 내놓고 우리 엄마도 낸다. 그리고는 큰 그릇을 넘겨준다. 나는 마루에 가서 돈을 가지런히 펼쳤다. 헤아려보니 이십만 원쯤 되었다.
처음에는 우리 집에서 돌잔치를 하고 싶었다. 우리 일터 사람들하고 곁님 일터 사람들을 부르고 동무들도 불러서 잔치하려고 했지만, 우리 딸을 키우느라 애쓰신 어머니가 하자는 대로 따랐다. 어머니는 모두 우리 짐을 덜어 주려고 한여름에 땀을 흘리며 돌잔치를 해주었다. 그때 어머니 나이가 올해에 쉰넷인 내 나이쯤 된다. 어머니가 젊은데 우리 딸인 손주가 할머니라고 불러서 그런지 할머니 티가 났다. 일만 하시느라 꾸미지 않고 우리 딸 키우느라 힘들어 늙어버린 듯했다.
백날잔치를 우리 집에서 했으니 돌잔치는 시골에서 해야 마땅했다. 아이만 돌봐도 힘들었을 텐데 어머니는 첫돌이 될 때까지 젖떼기밥도 해주었다. 어머니는 소젖보다 집에서 농사를 지은 곡식이 낫다며 손수 장만했다. 찹쌀을 쪄서 떡을 해서 말리고 덩어리를 잘게 뜯는다. 땅콩도 삶고 검은콩도 삶고 밤도 삶아 햇볕에 말렸다. 햇볕에 말려도 덜 마르거나 비가 오면 어머니는 애가 탔다. 비가 오면 잠도 못 잤다. 그렇게 말려서 삼거리 방앗간에 가서 가루로 빻았다. 가루젖하고 섞어서 먹이고 나는 영양제 하나를 곁들여 놓았다. 아이 밥인데 떨어질까 근심하며 몸에서 안 떨어지는 아이 업고 손품을 많이 들였다. 엄마인 나보다 사랑스럽게 말하고 우리 딸을 마음을 다해 돌봤다.
우리 엄마는 나를 류씨 집안에 시집 보내고 딸아이 첫돌이라고 사돈집에 처음 걸음했다. 엄마는 어머니가 마음을 다해 우리 딸을 보는데 속마음을 읽지 못하고 어설픈 집을 보고 이러쿵저러쿵 말했다. 시집온 지 서른 해 넘도록 어머니는 나쁜 말을 함부로 내뱉는 일이 없다. 말이라는 무서운 씨앗을 믿었다. 집이며 차림이 깔끔한 엄마보다 나는 조금 너저분하게 늘어놓고 살아도 어머니가 온 마음으로 우리 딸을 돌보아 주어서 내가 바깥일을 놓지 않고 버티었다.
시골 들일은 해야 하는데 우리 딸이 깨면 달래고 다시 잠들면 나와야 했다. 들일이며 밖이며 다니시지 않는 할머니한테 우리 딸을 맡긴다. 할머니는 어머니가 들키지 않고 나가도록 우리 딸을 어르고 달래며 한눈을 팔게 했다. 어머니는 수돗가에 있는 척 딸을 마음 놓게 하고 조용해지면 뒷문으로 살금살금 빠져 나와 들로 밭으로 갔다. 그래서 어머니는 신을 신고 걸어도 발소리를 내지 않는다. 담배를 피우시던 아버님은 어머니와 함께 쓰던 안방을 우리 딸한테 내주었다. 많은 걸 내려놓았는데 우리 집에서 돌잔치를 하자는 말은 꺼내지 못했다. 우리 딸이 튼튼하게 자라게 마을 할머니들이 마음을 보탠 잔치이다.
남들은 백날이라고 사진을 찍고 첫돌이라고 사진을 찍는데 그 돈 아낀다고 찍어 주지 못했다. 네 살이 되어서야 둘째 아이 백일 사진 찍을 적에 하얀 드레스 입고 돌 사진을 찍어 준 일이 두고 안타깝다. 마을 할머니 귀염을 한몸에 받고 증조할머니, 할머니 할아버지한테서 듬뿍 받은 사랑을 어느덧 아흔을 바라보는 할머니한테 돌려주고 나누며 살면 좋겠다.
2021.4. 6. 숲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