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하는 아이] 22. 체스

2021.03.03 16:32:03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내가 사랑하는 아이] 22. 체스

 

  잃어버린 체스를 찾았다. 아들이 여덟 살 적에 설날에 절하고 심부름해서 돈을 모았다. 모은 돈으로 체스를 샀는데 어느 날 감쪽같이 사라졌다. 한동안 잊었다. 아들이 열 살 무렵 책상을 옮기다 찾았다. 손바닥 크기에 납작한 체스 상자가 오락기(닌텐도) 칩을 숨겨둔 곁에서 나왔다.

 

  아들은 이름을 겨우 알아내고 두 누나를 꾀어서 체스를 했다. 조금 놀다가 큰누나가 방에 들어갔다. 차츰 밤이 깊어 가자 작은누나도 방에 들어간다. 먼저 들어간 큰누나한테 가서 놀자고 한다. 큰누나가 공부 끝내고 놀아 준다고 해 놓고 못 논다. 아들이 울음을 터트렸다.

 

  “나는 집에서도 왕따다. 으앙 으앙 으앙….”

 

  그리고는 울면서 방에 들어간다. 우는 아이를 달래 보려고 뒤따라갔다. 손잡이를 잡고 돌리려는데 안쪽에서 문을 잠그고 또 운다. 이러쿵저러쿵 지치도록 혼잣말을 한다. 문을 두드리며 열어 달라고 아무리 말해도 안 연다. 잔뜩 골이 났다.

 

  아들 방문 앞에 앉았다. 아들은 방에 나는 밖에서 문을 보고 말했다. 둘이 한참을 주거니 받거니 이야기했다. 여느 날 같으면 끝까지 울음으로 버티지만, 뚝 그쳤다. 그리고 차를 박은 일에 빗대면서 또박또박 말했다.

 

  “엄마가 그제 앞 차를 박았잖아. 그러면 박은 사람이 차를 고쳐주든지 돈으로 물어 주어야 하잖아?”

  “그렇지. 근데?”

  “그러니 내 오락기(닌텐도) 아빠가 버렸으니, 오락기 산 돈 십오만 원 물어내!”

  “그런 게 어딨어.”

  “난 만날 혼자 놀아야 하잖아. 닌텐도가 없어 친구 집도 못 가고 …….”

 

  어쩌다 아들은 오락기 이야기로 흘렸다. 엄마가 빼앗아 버린 오락기를 꼭 가져야 하는 까닭을 말한다. 그저께 아침에 아들을 학교에 태워 가다가 아파트 들머리 내리막길 건널목에서 멈추다가 옆자리 바닥에 떨어진 물건을 줍다가 발을 움직였다. 내리막길에서 움직이는 바람에 앞 차를 살짝 박았다. 아들이 그날 본 이야기를 하나하나 짚는다. 아들이 말하는 한마디 한마디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오락기에만 마음을 쏟는다고 생각해서 치웠지. 미안해 아들.”

 

  아들이 슬그머니 마음을 풀었다. 문득 아들이 가엾다. 꼭 안아 주고 싶다.

 

  “방문 열어 봐!”

  “들어오지 말고, 그냥 밖에서 말해.”

  “엄마가 벌 안 줄 게. 얼른 문 열어 줘.”

 

  아들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문을 열어 달라는 엄마 말을 듣지 않지만 억지부리는 목소리가 아니다. 아들을 가만히 둘까 하는 마음이 들지만, 일어나 부엌으로 갔다. 서랍에 둔 열쇠 꾸러미를 찾았다. 열쇠마다 적어 놓은 이름표를 하나하나 넘기며 아들 방 열쇠를 골랐다. 문에 꽂으려고 하자 안에서 문을 슬그머니 연다. 아들은 바닥에 앉았다. 나는 열 살 우리 아들을 꼭 끌어안고 침대에 눕혔다. 그러자 아들은 자지 않는다고 다시 씩씩거린다. 마음이 풀어진 줄 알았는데. 나는 아들 곁에 누웠다. 아까 둘이 한 말을 이어갔다.

 

  “우리가 잘못한 일은 얼른 고치자. 누나들이나 엄마 아빠부터 고칠게.”

  “응. 알았어.”

  “우리 아들 몸집은 작아도 생각은 크게 하기. 알았지?”

 

  아들은 머리를 끄떡끄떡했다. 착하게도 말을 잘 듣는다. 방학을 하고 집에 있으니 깊이 말을 나눌 틈이 생긴다. 울다가 그칠 줄도 알고 차츰 생각을 또렷하게 엄마가 알아듣기 쉽게 대꾸한다. 학교에 안 가니 먹고 자는 일도 달라졌다. 자꾸만 먹을거리를 찾고 잠이 부쩍 늘었다. 몸이 크려는 걸까. 여덟 시간 넘도록 자고 눈을 떴다.

 

  “엄마 이상해. 자꾸 잠이 와. 다시 좀 더 잘게.”

 

  잠을 많이 자는 아이가 아닌데, 더 자겠다고 늦장 부리는 아이도 아닌데, 잠을 많이 잔다. 누우면 이내 코를 골며 잠들고 아침에 부르면 발딱 일어났다.

 

  오늘은 체스를 무척 하고 싶은데, 더 놀아 줄 사람이 없다. 울고 문을 걸어 잠그는 아들이 버거우면서도 울고 난 뒤에 의젓해진 아들이 사랑스럽다.

 

  얌전하게 엄마 아빠 말을 잘 들으면 더없이 좋을까. 아무래도 아이가 어버이 말을 꼬박꼬박 들어야 한다고만 여긴 듯하다. 아이 마음이나 아이 자리에서 생각해 보지 않고 너무 서둘렀다. 막내인 열 살배기가 점잖게 굴면 오히려 안쓰럽다. 열 살이어도 아이가 제 목소리를 내면 좋겠다. 아무래도 나부터 아이를 길들이려 했다고 느낀다. 아이가 떼를 좀 쓴대서 나쁠 까닭이 없는데.

 

  ‘집에서도 왕따’라는 말이 무슨 뜻일까. 아들이 학교에서 왕따를 받았을까. 곰곰이 생각하니 문득 궁금했다.

 

  “너 학교 다닐 적에 왕따 당했나?”

  “나 그런 적이 없어.”

  “그럼 왜 열 살 적에 집에서도 왕따라고 말했어?”

  “그땐 엄마한테 불쌍해 보이려고 내가 꾀를 부렸지.”

 

  울음은 우리 아들 어릴 적 가장 잘하는 말이다. 울면 시끄러우니 달래려는 엄마 마음을 훔칠 줄 알았다. 이 아들내미가 어느새 자라 군대에 있다. 그런데 벌써 한 해 넘게 돌림앓이판이라, 군대에 간 아들이 휴가를 못 나온다. 우리 아들뿐이랴. 아들을 둔 어머니는 군대에 있는 아이가 얼마나 애틋하고, 또 보고 싶고, 또 어릴 적 일이 얼마나 자꾸 떠오를까.

 

2021.03.03. 숲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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